직장에선 '그래도 사람은 좋'은 건 다 필요 없다. 유사품으로, '애는 착해' 혹은 '그래도 성품은..' 혹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이런 것도 마찬가지다. 일하러 가는 곳에선 일 잘하는 사람, 적어도 자기몫은 하는 사람이 최고다.
사람은 사람이고 일은 일이란 얘기다.
역설적이게도 직장생활의 가장 뭣같은 면이 여기에 있다.
사람은 사람이고 일은 일이라면서도, 일을 못하는 사람과 지속적으로 함께 일을 하다보면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자본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말은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말 같지만, 실은 상당히 직접적이고 실존적인 말이다.
일을 한다는 건 그래서, 매순간 내 자신을 시험하는 일이다.
상대방의 업무적 무능을 인격적인 무능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일을 잘 할 수는 없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재주가 있고, 우연히 업무적으로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나눠써야하는 업무의 특성상, 상대의 무능은 고스란히 나의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 혼자만 바쁘고 같은 시간에 내가 저 사람의 두 배를 고생한다는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매순간 내 인격을 시험해야 한다.
누군가의 업무적 능력이 왜 내 자신과의 싸움이 되어야 하나. 이건 개인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누군가를 미워하게 만드는 착취적이고 획일적일 시스템 속에서는 한 인간의 재능이 가치로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재능에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이 뭘 잘하던 지금 이 일을 못하면 저 개무능한 반푼이 새끼는 1이 아니라 0.2인가? 라는 의구심과 싸워야만 한다. 하지만 그 싸움은 시스템이 대신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똑같은 코너에 몰려 함꼐 챗바퀴를 굴리고 있는 처지이면서도 서로를 증오하기까지 해야한다. 서로의 증오로 돌아가는 이 바퀴에서 재미를 보는 자는 누구일까. 1도 0.2도 아니다. 누군가 0.2의 몫을 한다고 해서 그가 0.8의 재미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내말은.
오늘도 나는 시험에 빠졌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사람이 미웠고 내 자신과 싸웠으며 패배했다.
현대인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은 불공평이다. (불공정이라고 하지 않았다. 불공평이라고 했다. )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거대하고 교묘해서, 불공평한 지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진짜 불공평이 시작되는 지점은 막연하고 뿌옇고 선명히 보이지 않아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미워하게 된다.
나는 내가 화가나는 불공평이 실은 동료의 업무적 무능 너머에 있음을 안다. 하지만 당장 내가 감당하게 되는 부담감과 늘어난 업무량만이 내 작고 편협한 시야를 가려, 눈 앞에 상대에게만 돌을 던지게 된다.
나는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
어차피 내가 할 일. 어차피 그가 못할 일.. 어차피 할껀데 내 인격을 시험하고 싶지 않다. 일은 일이고 사람은 사람. 부처님처럼 관대해지면 좋을텐데..
그런데 그렇게 관대한 마음으로 일을 떠맡으면 재미는 누가 보나. 나인가 그인가, 보이지 않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