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참았다가 다음에 걸려보게.
지금이 코로나 걸릴 땐가!
우리 국에도 확진자가 나왔다. 직원의 아이가 먼저 확진이 되고, 직원이 pcr 검사를 했는데 음성이어서 그냥 출근을 계속했고 아이의 격리기간이 끝난 후 다시 pcr을 해서 확진이 된 경우였다. 이를 두고 직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아이가 집에서 계속 마스크를 쓰고 있을 것도 아닐 건데 어떻게 계속 출근을 할 수 있느냐. 그걸 출근을 하게 한 관리자가 미친 거다. 어떻게 그 부서의 직원들은 다 그걸 알고도 그냥 그대로 두고 보고 있었던 거냐 하는 식의 말이었다. 결국 선거가 코 앞인데 확진자가 나오면 어쩌자는 거냐가 핵심이었다. 우리가 인간을 대하는 방식엔 언제나 이런 면이 있다. 애초에 코로나가 발생하면 왜 업무가 마비되는 것인지 왜 예방접종을 세 번이나 맞았고 어째서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지는 아무도 떠올리지 않는다.
누구도 그 사람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몸은 좀 어떤지 먼저 걸린 아이는 좀 괜찮아졌는지 그 가족들은 모두 안녕한지.
감히 선거 기간에 누가 아플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전염병이라니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공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타인의 안녕보다 당장 닥친 나의 불편함이 먼저다. 이건 악의와는 좀 다르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이라서 그렇다. 원숭이가 인간이 된 이후로도 우리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회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회사가 원하는 인간이 되는 것도 어쩌면 우리 진화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목구멍은 곧 포도청이 아닌가.
진화의 과정이 다 그렇듯, 진화한 종은 널리 확산되어 다수 종이 되고 소수종은 도태된다. 인간을 대하는 이다수종의 방식은 빠르게 전염되고 확산된다. 전염병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개개인에게 특별하지만 타인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모든 일로 확대된다. 누군가의 출산, 누군가의 질병, 누군가의 육아시간, 누군가의 소소한 가정사까지. 무슨 상관인가 감히 선거기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