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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에도 정도가 있다면.

by 기묘염

어떤 인간은 배경음악과 함께 도착한다. 영화와 달리 그건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하필 들어오는 순간 벨이 울리는 건 데스티니라 치더라도 내 자리에 오는 순간까지 끄지도 받지도 않은 채, 음악을 이기는 의지의 데시벨로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요주의 인물일 가능성이 많다. 태도는 곧 그 사람인 법. 소음에 대한 정의가 평균치를 뛰어넘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음 그 자체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민원인을 상대하는 일을 오래 하다 보면, 그 사람의 표정 말투 제스처 걸음걸이 하나까지 힌트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게 일종의 편견인지 통계치인지 나의 직업병인지 뭔지 나조차 확실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불길함을 느꼈다면 조심을 하던지 각오를 하던지 뭐든 하긴 해야 한다. 어떤 인간은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시련인데 보라 시련을 극복한 자들은 강해지는 법.

나는 강해지다 못해 말랑말랑해져서 누가 아무리 눌러대도 탄력 있게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리 실랑이를 해대도 아무렇지 않다. 이러나저러나 하루는 간다. 네가 아무리 짖어봐라 어차피 내 마음에는 귀가 없으니.


초년생이었을 때는, 모든 것이 충격의 연속이었다. 일단 나를 부르는 통일되지 않은 호칭부터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첫 번째 충격의 호칭은 '아가씨'였다. 이건 주로 어르신들이 많이 사용하는 호칭인데 옆자리에 앉은 남직원에도 '총각'이라고 부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었다.

두 번째, '언니'. 누가 봐도 내가 한참 동생인 거 같아서 의구심이 들지만, 어떤 아저씨의 느글느글한 '누나'를 들은 이후에는 언니 정도는 인정해 줄 수 있다.

세 번째, '이봐요'다. 이봐요나 저기요나 다 너랑 나의 경계를 가르는 호칭이지만 이건 조심해야 한다. 이건 이것 봐요라는 말이다. 공격적인 명령어다. 이 말을 타인에게 쉽게 쓸 수 있는 사람은 태생이 전사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무지 화났거나. 둘 다 나에겐 좋지 않다.

호칭을 극복하고 나면 다음은 욕을 극복해야 한다. 이건 특정 연령대의 특정성별에게서 주로 보이는 특징인데 , 화가 나면 그냥 욕부터 나온다. 물론 상대방이 (즉, 내가) 욕을 해도 될 것 같아서( 즉, 만만해서) 하는 거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특히 젊은 여자에게) 욕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들은 "아니! 상식적으로"(물론, 지만의 상식이다)라는 말을 즐겨 쓰고 "씨발"은 추임새며 "좆같다"라는 말을 좋아한다.(본인의 좆에 대한 불만족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내알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는 ㅈ도 없는데 자꾸 ㅈ같다고 하시니까 정말 ㅈ같네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아쉬울 뿐이다. (쇼미 더 머니에나 나가볼까)


그다음은 좀 더 어렵다. 이분들은 뭔가를 알고 있다. 나는 안다 나는 알기 때문에 너는 모른다. 나는 알기 때문에 내 말이 다 맞고 너는 다 틀리다. 이 우주에서 나만 안다. 이런 분들을 만나면 하루가 아주 빠르게 간다. 그분들은 본인의 앎을 알리는 데에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 하루 온종일 본인이 맞다는 걸 설명할 수 있다. 그래 나의 하루는 오늘 너의 것이다.라는 마인드로 상대하면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루가 마감할 때쯔음 본인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되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시간이 아깝다는 걸 인지하게 된다. 그땐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본인이 하루 동안 시간 낭비했다는 것과 그 하루 동안 자기를 응대한 상대방의 태도를 문제 삼기 시작하는 편리한 인생관을(자기 자신에게만) 보유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그저 태도만 신경 쓰면 된다. 어떤 게 되고 안되고 맞고 틀리고는 어차피 정해져 있는 거고 언젠간 밝혀질 일이니 시간을 넉넉하게 할애해서 그저 그 후에 꼬투리 잡을만한 욕지기만 참을 수 있다면 문제없다.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나면 요령이 생긴다. 민원이 발생하면 일단 내 실수를 먼저 살핀다. 내가 실수했다면 바로 인정하고 사과한 후 해결책을 찾으면 된다. 문제는 상대의 실수다. 그냥 실수를 인정하면 인간 대 인간의 해프닝이 되지만 아닌 경우가 많다. 그저 불편함에 대한 민원을 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민원에서 찾는 것 같은, 말 그대로 민원의 , 민원에 의한, 민원을 위한 진정한 '민원인'도 있다. 사실 존재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나. 그저 저인간도 존재하기 위해 저러나 보다 하고 이해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 받아들이고 나면 이제 선택의 시간만 남는다. 민원인을 많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내가 위치한 이 자리를 벗어났을 때, 나의 포지션을 정하는 일이다. 보고 배운 바가 있으니 아는 놈이 더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민원계의 대부가 되거나, 아니면 보고 느낀 바가 있으니 상대방을 다각도에서 배려하게 될 수도 있다. 마치 시집살이를 호되게 겪은 며느리가 나중에 어떤 시어머니가 될지를 선택하는 문제와 비슷하다. 내 경우에는 최대한 후자가 되려고 노력은 하는 편이다. 전설의 고향에 나올 것 같은 시어머니가 된다고 해서 누가 열녀비를 세워주는 것도 아니고.. 남의 수명에 영향력 행사할 것 있나 싶어서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주의해야 할 몇 가지 말들이 있다.


첫째는, 왜 안 알려주셨어요? 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우리는 상대방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뭘 알고 뭘 모르는지 알 수 없다.(참 다행이다) 보통의 서비스직이 업무 시 고지하는 내용은 미리 정해져 있다. 평균적으로 알 거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예외적 상황이거나 특별한 상황에만 알아야 하는 것은 미리 알려주지는 않는다. 이 정도는 알겠지 전재하는 내용들을 몰랐다면 상대방이 알려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직원들은 내가 얼마나 모자란 인간인지를 알고 있는 엄마가 아니다(정말 다행히도).

내 상황이 풀리지 않을 때, 순간적으로 남 탓을 하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지만, 그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둘째는 '상식적으로' 다.

상대방이 묻지 않은 나의 얄팍한 상식을 굳이 먼저 드러낼 필요는 없으니까. 나의 상식은 남의 상식은 아니고, 나중에 그게 틀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럴 확률이 매우 높다 ) , 단지 잘못 알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내가 상식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라는 것을 늘 새기고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건,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상대방의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이다. 이건 진짜 안 해야 하다. 내가 겪은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민원은 이런 식으로 끝난다.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그런데 저 직원은 왜 이렇게 불친절해요? 라든가, 근데 좀 기분 나쁘네 그럼 이런 식으로 말해줬으면 됐잖아요.라는 식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 본인이 실수 좀 했다고 해서 굳이 이렇게 찌질해질 필요까진 없지 않나. 그냥 깔끔하게 인정하는 편이 훨 보기 좋다.


결국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실수도 할 수 있고, 좀 불편할 수도 있다. 어느 날은 내가 민원을 받는 사람일 수도 있고, 다음날은 내가 민원을 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일에 매번 본인의 바닥을 가늠해볼 필요가 있을까. 좀 다정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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