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자의 낡은염려
뒤쳐졌지만 더 뒤쳐지고 싶다
조금 뒤떨어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인스타도 유튜브도 잘 몰라서 40대 50대 언니들이 "넌 어쩌면 나보다 더 모르냐"며 흡족하게 비웃곤 한다. 인터넷도 거의 안 하지만 그렇다고 조간신문이나 아홉 시 뉴스로 세상을 접할 정도는 아니다. 가끔 메인화면에 뜬 기사들로, 의도치 않게 알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알게 되는 정도다.
어떤 기사를 접하면 감정이 끓어오르면서 아 이게 맞는 건가 이대로도 괜찮은 건가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잠시 잠깐 분노하고 다른 기사 몇 개를 클릭하고 나면 처음 느꼈던 감정은 가라앉고 이런저런 감정에 휩쓸리다가 모든 것이 흐지부지 되어버린다. 결국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국 남의 일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주는 무력감에 상처를 받아 허무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내려놓게 된다.
이런 식인데 어떻게 핸드폰을 든 손을 놓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 수많은 정보들이, 애초에 나의 의도로 읽은 것도 아닌 무수한 기사들이 , 누구의 의지인지도 모를 것들로 점철된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나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이 통제 불가능한 정보들 틈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 이것이 나의 생각인지 남의 생각인지 어떻게 혼돈하지 않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런 것들을 보고 어떻게 "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모두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내가 어디까지 몰라도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늘 점심시간엔 몹쓸 짓으로 표현된 성범죄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를 쓰면서 기자는 본인의 몹쓸 어휘력이 부끄럽진 않았을까. 기자는 뭘 알고 있고 또 뭘 모르고 있나. 그 기사를 읽은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되었고 여전히 모르는 건 무엇일까.
요즘은 내가 접하게 되는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다.
나는 뒤처졌지만 때론 내 아이도 너무 앞서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한다. 나는 잘 모르는 것투성이고, 아이가 무언가를 ' 안다'라고 말했을 때, 내가 그 사실을 수긍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아는 것이 너무 많은 아이로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정된 정보로 깊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아이였으면 좋겠다.
극성스러운 부모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닌데.
한 발짝 떨어져서 좀 무던하게 아이를 키우려다가도 유튜브가 내 아이를 채갈까 벌써부터 겁이 덜컥 나곤 한다.
어쩌면 아이를 키워내고 보호해내는 역할은, 실재하는 위험보다 내 상상과 불안으로부터 아이를 지켜내는 것이 가장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자라면 어쩌나 하는 상상 속의 모든 미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