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이 주째 항생제를 먹고 있다. 코가 좀 막히는 거 빼고는 별다른 증상이 없는 거 같은데 병원에 갔더니 목이 더 부었다며 항생제를 다른 걸로 바꿔보자고 했다. 겁먹은 아이가 울고불고 바둥거리며 힘들게 진료를 마쳤는데 세상에 항생제를 냉장 보관하는 걸 깜빡 잊어버렸다. 약을 다시 처방해야 해서 또다시 애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아이는 당연히 또 겁을 먹었고 울고 불고 바둥거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탁 위에 그대로 나동그라져 있는 꽉 찬 항생제 병을 발견했을 때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처음엔 아 진짜 나 뭐 됐구나. 망했다. 였다가 천진하게 내복 바람으로 뛰어다니는 해맑은 아이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망한 건 너구나 미안하다. 하는 죄책감이 든다. 실수를 만회해보고 싶은 마음에 병원에 전화를 해서 냉장보관을 딱 하룻밤 안 했는데 괜찮을까요 괜찮지 않다면 약만 다시 받을 수는 없을까요 하는 하나마나한 질문을 했다. 안되는 거 알면서도 안된다는 걸 확인받는 것이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처럼. 난 할 만큼 했고 알아볼 만큼 했으니 이제 병원에 가볼까? 라는 얘기를 당당하게 아이에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좀 비겁하게 대처했고, 내 비겁함이 부끄러워서 아이에게 호들갑을 떨면서 사과했다. 엄마가 약을 올바르게 보관하지 않아서 네가 오늘 한번 더 진료를 받아야 될 것 같아 미안해하고 사과를 했더니 아이는 용서 대신 거래를 제안했다. 괜찮아 그럼 병원 갔다가 키즈카페에 가면 되잖아.라는 거다. 역시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더니. 비겁한 엄마의 거울답게 계산에까지 능한 게 아닌가!
행동거지 조심해야겠다고 또다시 다짐하게 된 하루였다.
월요일 화요일엔 정말로 화장실도 못 갈 정도로 바빴다. 감정노동자의 감정에는 용량이 정해져 있어서, 바쁜 날은 제 아무리 이타적인 인간이라도 더 이상 사람들에게 호의적일 수가 없다. (대신 더 호전적일 수는 있다. 호의는 감정에서 나오는 거지만 호전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온다.) 심지어 나처럼 감정의 용량이 넉넉하지 못한 인간은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이미 갖고 있던 모든 것이 바닥나버린다. 나는 기계적이고 건조하고 감정하나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하루 종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서비스의 본질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반복되는 일에 의미 없이 대상만 바뀌는 것이다. 내 앞에 있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개여도 나는 똑같이 말하고 웃고 반복할 수 있다. 물론 가끔씩 진짜로 사람이 아니라 개가 와서 서있기도 한다. 개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모두가 바쁘고 힘든 시간을 보내 골골거리고 있을 때, 나는 무심하게 내가 목요일에 연가 쓰는 거 알고 있지?라고 확인을 했다. 내가 특별히 소시오패스여서가 아니라, 나도 코너에 몰린 부모라서 그랬다. 이 주간의 긴급 보육이란 곧 직장 내에서 소시오패스가 되라는 거다. 코로나가 누굴 탓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염을 막기 위해 당연히 내가 감수해야 할 몫이지만, 내가 혼자 오롯이 감당하지 못한 이 책임의 몫은 의도치 않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된다.
어쨌든 나는 오늘 쉬었다. 싫은 소리 못하는 따뜻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해야 하는 건지, 나에게 두꺼운 안면을 주신 신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가 원한 것도 아닌데 내가 낳아서 나오게 된 내 아기에게 이딴 영광을 돌리고 싶지는 않다. 오늘은 나와 놀지만 내일은 나만큼이나 두꺼운 안면을 가진 아빠와 놀아야 할 내 아기는 그저 이 상황이 좋기만 한 것 같다. 어린이집도 안 가고 엄마 아빠가 매일 놀아주고, 심지어 병원도 두 번이나 간 아이가 이 순간을 맘껏 즐길 수 있다면 난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