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짐승인데 나보고 어쩌라고..

by 기묘염

업무 중에 집에서 전화가 오면 가슴이 철렁한다. 일하는 걸 뻔히 아는데 굳이 전화를 한다는 건 급하다는 거고 내 경험상 급한일은 좋은 일보단 나쁜 일인 경우가 더 많다. 30개월 된 아이를 맡겨두고 회사에 나오는 엄마의 입장이 되고부터는 더욱 그렇다. 전화벨이 울리는 찰나의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평소엔 상상력이 빈약한 편이지만 나쁜 쪽으로는 제법 창의적인 구석이 있다.


며칠 전 근무 중에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평소에 아빠가 먼저 전화를 하는 일이란 거의 없는 데다가 그날따라 아이를 맡겨놓은 터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큰 일 났다 너 지금 조퇴할 수 있어?"라는 거다.

"왜!? 뭔데 무슨 일인데?"

"엄마가 갑자기 무릎이 삐걱하더니 일어나지를 못한다. 지금 아예 움직이지도 못해서 구급차 불러야 할 거 같은데 애가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얼른 와서 애를 데려가야 할 거 같은데?"

나는 평소에 내가 그럭저럭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 순간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예감대로 나쁜 일이었고, 걱정이 돼야 마땅한데 걱정보다 앞 선 감정이 있었다.

안도였다. 나는 분명 조금 안도했다.

그런 후에 부랴부랴 걱정했다. 걱정을 하긴 했지만 그게 온전한 걱정이었는지, 죄책감을 감추기 위한 기만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나는 바로 조퇴를 하고 엄마 집으로 달려갔다. 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괴로워하는 엄마를 확인하고, 구급차를 기다리면서 내가 뭘 했냐 하면, 아이의 점심을 먹였다. 검은 머리 짐승의 유전자에 새겨진 이 배은망덕에 대해 찰스 다윈 씨를 모셔와서 의견을 좀 듣고 싶다. 이 배은망덕은 신의 영역인가 아니면 진화의 산물인가.


엄마는 충격으로 흥분해서 그런지 갑자기 열이 올랐다. 도착한 구급대원들이 난감해했다. 이렇게 갑자기 다치면 열이 오를 수도 있는데, 문제는 열이 오르면 응급실에 가도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일단 코로나 검사를 하고 다음날 결과 나올 때까지 격리라는 거다. 지금 가서 격리가 될지, 열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구급차를 부를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다친 곳이 지금 당장 죽고 사는 부위는 아닌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코로나는 코로나 그 자체로만 위험한 게 아니었다. 몸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열을 내는 선택을 하겠지만, 몸의 최선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비극이 초래된다.


꼼짝도 못 하던 엄마는 이제 화장실은 갈 정도로 호전되었다. 집 밖으로 나가긴 무리지만 집 안에선 절뚝이며 돌아다니게 되었다. 정말 다행이라 여기고 순수하게 걱정만 해야 하는데 여전히 나는 이기적이다. 어린이집 휴원이 연장되었고 내 상황은 더 나빠졌다. 심지어 선거우편물 때문에 2월에는 엄청난 주말출근이 예정되어 있다.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선택과 집중이라고? 내 생각은 다르다. 인생은 선택의 여지없이 눈앞에 닥친 급한 파도부터 간신히 막아내며 나아가는 거다. 지금의 내가 엄마와 아이 중에 누굴 선택해서 어떻게 집중할 수 있겠나. 배은망덕한 와중에도 엄마를 포기한 건 아니고, 아이를 먼저 선택했지만 아이에게 죄책감을 안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일을 포기하고 사람을 선택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은 나에게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생존의 영역이다. 선택하고 집중하라니.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오만한 말을 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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