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아이 미국 유학 중 깜짝 서프라이즈로 엄마를 연극무대에 출연시켰던 아주 오래된 농담 같은 즐거운 사건이 있었어요. 배우들의 무대 앞자리 일렬에 앉은 시점부터 연극상황이 펼쳐진 거였죠. 그때 내 역할은 '보름달 엄마에게' 라디오에 보낸 편지를 배우가 읽어주는 장면에서 감동의 눈물을 펑펑 흘려야 했어요. 근데 엉뚱 생뚱하게 눈물 대신 화가 났을 걸요. 느닷없는 서프라이즈로 평생 처음 맞는 이벤트가 그냥 흘러가는 게 억울해서 평생 각인해 둘 카메라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모습으로 감동을 대신했거든요.
'그때 그 사건'의 감동박살 낸 엄마배우였다고 눈 흘기는 딸들과 시간이 한참 흘렀어도 여전히 서운한 엄마는 '흔적 없이 사라진 이벤트'였다고 기억을 더듬어요.
오늘도 어머나! 세상에! 감동을 해야 했을 걸요. 집 근처 공원을 간다길래 뒷마당 풀 뽑다 말고 덜래 덜래 나섰는데 요트를 탄다네요. 뭐 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요트를 타기 위해서는 준비과정이 복잡하거든요. 호세는 미리 시험을 치러야 했고요, 적당히 깜짝 놀라게 할 날짜를 잘 잡아 세팅을 해놔야 했죠. 멋진 이벤트에 걸맞은 풀세팅 엄마가 되도록 미리 언질을 좀 주지. 이번에도 눈물 대신 눈 흘기기.
강 같기도 바다 같기도 정말 넓어도 너무 넓은 레이니어 레이크예요. 4시간이나 빌렸다니 너무 긴 시간 다 뭐 하나 했는데 돌아오는 길이 꼬박 한 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넓은 호수였어요. 중간중간 쉴 수 있는 작은 섬들이 여럿 있어요. 고운 흰모래 깔린 모래사장에서 수영하고 맥주도 마시고 그늘에서 쉬기도 하니 4시간이 긴 게 아니더라고요. 호세가 빌린 요트는 8인승이라 제법 크고 그늘막도 있어서 편안했어요.
사진을 찍는 족족 하늘은 구름을 휘황찬란하게 그려대고 수직으로 내려 꽂히는 작렬한 햇빛에도 다들 웃는 얼굴이었어요. 뜨거운 열기가 더 치열할수록 추억은 아름답게 포장되는구나, 한 시간을 남겨두고 돌아오는 길, 너무 광활한 호수에서 잠시 길을 잃었어요.
길을 찾는다며 여기저기 호수를 돌아다니다가 전에 여길 와봤다는 기억이 났잖아요. 대왕참나무 즐비한 길에 초승달이 떠있던 십이월이었을 걸요. 느닷없이 나타난 다람쥐 따라 걷는 참인데 불빛축제를 한다는 광고배너를 보고 찾아간 곳이 레이니어 레이크였구나! 산꼭대기에선 영화 미라클이, 산아래는 온갖 반짝이는 것들이란 다 모여있었어요. 평생 볼 반짝반짝 트리를 다 본 듯한 황홀에 잠식되었던 기억을 되살리느라 잠시 호수에서 길을 잃었던 거였군요. '잠시 길을 잃어도 괜찮아' 느긋한 호세는 다 계획이 있던 거였어요. 길을 잃어 잠시 혼란에 빠진 상황마저 이벤트였다니 믿어야죠. 정확히 5분을 남기고 출발지에 도착했으니 퍼펙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