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준비 없이 떠났던 스톤마운틴에서 악몽과 감동을 함께 받았잖아요. 이번엔 시차적응도 완벽히 마쳤고 주말 날씨도 쾌청하다고 하니 제대로 된 여정을 즐겨볼 참이거든요. 어디를 갈까, 긴 여정을 감당할 체력과 날씨가 받쳐줄 때 떠나자, 조지아주 주립공원 프로비던스 캐년으로! 별 가득한 밤 술 가득 따라 마시며 나눈 얘기도 이른 아침 새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나눈 얘기도 프로비던스 캐년에 대한 것이었어요.
호세와 옆지기는 조지아주의 7개 불가사의에 속하면서도 조지아주의 리틀 그랜드캐년이라 칭송받는 프로비던스 캐년이니 이름값 제대로 하지 않겠냐, 가야 한다.
하늘인 해밀턴 밀에서 왕복 6시간, 이동차량이 테슬라이다 보니 중간경유지에서 충전을 해야 하는 것까지 고려하여 왕복 8시간이 걸리는 먼 길은 은하수에게 무리다. 광활했던 서부의 그랜드캐년을 이미 싹 훑고 온 터이니 별다를 게 있겠냔 거지요.
할미와 은하수는 중립이에요. 굳이 말하자면 사람보단 테슬라가 힘들 것 같단 의견만 보탰어요. 한여름 블루테슬라는 시원하지 않을 뿐더러 뒷좌석에 세 사람이 타기가 불편했거든요. 너무 더운 애틀랜타 여름은 24시간 에어컨이 돌아가는 집 안이 제일 좋거든요.
신나는 토요일에 신나는 일은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에 있다! 두 남자가 합의를 본 거예요. 일주일 전에 별을 보며 계획한 프로비던스 캐년, 이른 아침 허기는 햄버거로 채우고 마음을 충전할 바쇼의 하이쿠시집도 테슬라에 태우고 출동합니다!
산과 강의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란, 하이쿠 시인 바쇼의 여행수칙에 콕 박혀있는 문구를 기억해 냈어요. 조지아주의 주립공원이니 역사적인 장소가 맞을 프로비던스 캐년은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소박한 자연미인이에요. 사실 자연만큼 위대한 예술가는 없지 않겠어요. 손대지 않아 때 묻지 않은 대자연의 품에 드는 순간, 집 밖에 나온 나를 칭찬합니다.
땅 넓으니 자리다툼 없이, 하늘 광활하니 가릴 데 없는 나무들의 의기양양 잘난 척 뽐내는 자태를 감상하며 걷는 길이 제법 좋아요. 아직은 여름이 열기를 품기 전이라 서늘한 숲의 기운에 상쾌까지 동원돼 걷는 길이지요.
비지트 센터에서 프로비던스캐년을 탐색하는 세 가지 방법을 알려주네요. 협곡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걷는 화이트 트레일, 협곡 아래에서 1~9까지 물길을 따라 걷는 트레일, 캠핑과 하이킹이 가능한 트레일코스 가운데 우린 물길을 따라 찰박이며 걷는 협곡 아래로 내려갑니다.
어머!! 모두의 외침이 발아래를 향해요. 자분자분 발아래 밟히는 모래들이 밀가루처럼 곱고 형형색색 눈을 홀리듯 아름다워요. 분명히 하얗고 고운 모래를 살짝 밟았을 뿐인데 내 발아래 붉고 흰모래가 꽃그림을 그리며 나타나네요. 일대 전체가 붉은 황토흙지대라서 발길에 묻어난 자리만 붉게 스며드는 하얀 모래가 신비스러웠어요.
캄보디아 열대우림지역 숲 우거진 강을 쪽배 타고 체험했던 그때가 생각나는 물길탐험은 또 어떻고요. 강 대신 자박자박 물 흐르는 모래만 다를 뿐이었어요. 하얀 운동화를 신은 은하수는 호세와 할아버지 어깨에 매달려 있어야 했지만 눈은 꽃을 보며 웃느라 그저 신이 났어요.
1부터 9까지 뷰포인트가 표시된 이정표만 덩그러니 있어서 적당히 헷갈리기 참 좋은 길이에요. 여긴가 저긴가 술래 찾듯 가장 아름답다는 3, 4 포인트로 직진하는데 아무래도 다른 탐험객들과 동선이 자꾸 겹치게 돼요.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온 사람들과 마주치며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의 안부를 묻느라 떠들썩해집니다. 반려견과 동행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어요. 대부분 저절로 겸손하게 비켜서게 되는 대형견들이라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들려도 은하수는 호세에게 대롱대롱 매달립니다.
서부 그랜드캐년에선 차마 만져보지 못하고 눈으로만 담았던 캐년인데 프로비던스 캐년에선 뷰포인트의 인기가 많을수록 곳곳이 낙서예요. 사진에 담으려고 살짝 올라서니 금세 부스러지는 흙 때문에 자그마한 둔덕이 무너져서 놀란 가슴 한참 쓸어내렸어요. 벌금이 어마어마하단 푯말을 봤거든요. 그런데 내 뒤로 앞으로 어마무시하게 거대한 미국사람들이 수시로 오르고 내리니 머잖아 사라지고 없어지는 건 아닐지 또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다른 사람의 것은 바늘 하나든 풀잎 하나든 취해서는 안된다. 산과 강과 시내는 모두 하나의 주인이 있다. 이 점을 유의하라던 1600년대 살았던 바쇼가 이 광경을 봤다면 어땠을까요?
3, 4, 5, 6, 7, 8, 9 포인트 인증숏 완료한 4시간 트래킹은 적당했어요. 미지근한 민낯이라는 1, 2 포인트를 거쳐 가장 아름답다 칭송받는 3포인트를 눈앞에서 맞닥뜨렸을 때의 그 희열은 꽃향기에 어른거리던 모기에게 물린 팔다리의 고통과 나눌 만했고요. 그랜드캐년에 갇힌 게 아닐까 싶었던 광활함은 선뜻 가까이할 수 없는 높은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감상'이었다면 프로비던스캐년은 가까이에서 세심하게 보여주는 아주 다정함이 있었어요.
친절하지 않은 안내 이정표, 찾기 힘든 쉼터 등으로 사람에겐 불친절했지만 손대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자랑하려는 건지 태생적 게으름 탓인지 치장하지 않고 맞은 캐년이라서 더 아름다웠던 게지요? 대자연의 자연스러움은 당연한 거니까요. 그러고 보면 산길을 걸을 때마다 하나씩 늘어나는 의자와 정자 등 내가 돌아가야 할 그곳의 치장은, 자연보다는 사람을 위한 거였죠. 자연을 위해서라면 불친절도 감내해야겠어요. 글자 하나라도 그대를 가르친 사람에게 감사하라고 바쇼가 전하니 늘 자연에게 배우는구나 깨닫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품고 돌아올 수 있어서 또 감사했어요.
세상에 태어나 35개월 사는 동안 놀며 사는 일이 너무 즐거워 은하수는 낮잠이라는 걸 자본 적이 없었거든요. 귀갓길 테슬라에서 한 시간이나 잠을 잤다는 건, 그만큼 은하수도 프로비던스 캐년의 자연에 충분히 동화되느라 힘들었다는 겁니다.
집에서 인천공항까지 1시간, 공항에서 애틀랜타까지 16시간, 해밀턴 밀까지 40분, 해밀턴 밀에서 프로비던스까지 4시간 꼬박 하루가 걸려야 닿을 수 있는 프로비던스캐년이니 또 올 일이 있을까요? 이렇게 내가 보고 걸었던 길은 처음이 마지막이 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처음 걷는 길도 끝사랑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걸어 다녔어요.
따뜻한 눈으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이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걷게 됐어요. 우연히 마주치며 닿는 모든 것들에게 참 다정하구나 말을 걸어요. 머잖아 은하수가 걸을 길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