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나의 여정이라고 말한 돈키호테의 숨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곳,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사흘을 묵었다.
발 닿는 땅과 하늘 어디고 간에 예술이 아닌 데가 없다. 보이는 모든 게 다 예술이라 태양이 빛나는 동안 빛의 색채에 동화된 나도, 일몰의 어스름 아래에 잠겨든 나도 예술인가 싶게 물드는 곳이 바르셀로나였다. 사흘을 머문 람블라스 거리 인근에 위치한 숙소도 몇 백 년이라는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예술작품이었다. 따순 온기가 조금은 그리운 돌집이라 미리 쟁여간 핫팩을 깔고 자야 겨우 잠이 들긴 했으나 가우디와 피카소, 달리, 세르반테스 등 당대의 거장들과 잠들기 전 상그리아 건배로 이내 뜨거워질 수 있었다. 예술을 위하여!
바르셀로나의 거리를 할 일 없는 사람처럼 걸어 다니기로 했다. 특별한 일정 없이 생각나는 대로 바르셀로나를 즐겨보자는 거지. 시장에서 입맛들인 새우튀김을 입에 물고 카탈루냐 광장에서 람블라스 거리를 햇빛이 놓아주는 음표를 밟으며 걷다가 콜럼버스를 기리는 60미터 높이의 탑 앞에서 불현듯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나온 게 생각났다. 이럴 때 엄마란 이름으로 열외가 된다는 게 좋다. 난, 엽서를 들고 끄적거리기 시작했고, 딸들이 가위바위보를 한다. 결국 현정이가 당첨! 바르셀로나로 올 때 불운을 다 써버렸나, 하늘은 회색인데 딸의 얼굴은 화안한 푸른색이다.
빨리 뛰어갈 일 없는 여행길이고 이삼십 분은 기다려야 음식이 나오는 스페인 식당인지라 어디서든 엽서에 끄적거리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자연스레 관찰자모드로 사람들을 바라보다 느낀 점 하나, 스페인 사람들은 대개가 무표정한 얼굴이란 거다. 위대한 천재 가우디의 예술적인 작품을 돋보이기 위한 절제미인 듯 그들은 친절하지 않다. 의상을 돋보이려고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걷는 모델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사랑스럽고, 검은 부츠를 신은 여자들은 날씬하고 예뻤으며 구레나룻에 가죽재킷을 입은 남자들은 멋져서 저절로 용서가 된다. 그들은 스페인 어디서나 들리는 종소리처럼 어디서든 뽀뽀한다.
스페인 여자나 남자나 뽀뽀처럼 즐기는 게 바로 담배다.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이 물고 다니는 담배처럼 어디서나 비둘기도 따라다니고 개들도 많다. 그럼에도 담배꽁초도 비둘기똥, 개똥은 보이지 않는다. 해변길 따라 걸으며 일부러 찾아봤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여기 있었네.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내면의 추함을 들춰내고 싶은 야비함이 드러나는 중이다. 상그리아로 수혈을 해야 할 즈음이 됐단 거지.
분명 십이월인데 해변은 여름이다. 반바지에 반팔 차림으로 태양을 적나라하게 마주하는 스페인 사람들 틈에 우리만 한겨울 무장한 차림이라 뻘쭘한 마음도 옷도 무겁다. 반패딩재킷과 부츠가 필요한 스페인 바르셀로나다. 두꺼운 외투부터 벗어 들고, 그다음엔 털신까지 벗고 해변을 걷는다.
옷가지들로 무겁고, 허기로 만사가 귀찮을 무렵 해변을 살짝 벗어난 끄트머리에서 해변맛집을 찾았다. 2호점까지 있다는 로컬맛집으로 주방 천장엔 줄줄이 빼곡하게 널어놓은 빨래처럼 하몽이 늘어서 있어서 기괴해 보였으나 식당 안엔 스페인 현지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믿음이 갈 수밖에 없지. 환타스틱한 빠에야, 싱싱한 굴은 감칠맛이 예술이며 식당마다 조금씩 맛이 다른 상그리아도 달짝지근하면서도 오묘한 맛이라 한 잔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대낮임에도 엄마나 딸들 얼굴엔 붉은 노을이 걸쳐있어 예~술 하다 예술에 물들었다며 한없이 깔깔거린 날이다.
일몰의 성지, 몬주익성으로 향하는 길은 어디든 생기로운 풍경이라 딸들은 카메라를 들썩이며 쉴 줄을 모른다. 길마다 오렌지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12월 초 겨울인데 수채화물감으로 투명하게 그린 듯한 꽃들의 자태는 또 얼마나 예쁜지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러나 케이블을 타고 걷다가 버스를 타고 또 걸어 찾아든 길이라 지친 엄마들은 그저 쉬고 싶다. 떠나올 땐 무료입장이던 몬주익성이 도착 즈음 유료화돼서 왔다 갔다 길을 헤매다 일몰을 놓쳐버렸다. 아쉬워하는 참인데 몬주익 성 뒤에서 스페인 남녀가 사랑싸움을 하고 있다. 특별한 한정판을 감상하기 위해 평범한 일상을 뒤로하고 멀리 떠나온 길에 맞닥뜨린 소소한 일상의 그림이 오히려 특별하더라. 그래서 팝콘을 준비해 구경하고픈데 곧 어스름이 들이닥칠 낯선 길이니 제법 앙칼진 여자의 스페니쉬 발음이 얼마나 치열하고 격렬한지를 느끼며 걸음을 재촉한다.
에스파냐 광장으로 이어지는 마리아 크리스티나 거리의 음악분수대에서 레이저와 함께 펼쳐지는 분수쇼는 세계 3대 분수쇼(라스베이거스 분수쇼, 바르셀로나 분수쇼, 두바이 분수쇼) 가운데 하나란다. 위에서 아래로 도미노가 쓰러지듯 음악의 선율에 따라 분수가 춤을 춘다. 빛에 취하고 물빛에 흔들리며 상그리아에 젖은 바르셀로나의 밤은, 너무 추워서 잠들 때까지 상그리아를 마셔야 했다. 엄마들, 잠 안 자고 뭐해? 응? 예~ 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