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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숙 Apr 25. 2024

그라나다에선 누구나 초승달이더라

5. 꽃다운푸른과 함께 그린 스페인여행/그라나다

늦은 밤 열한 시에 닿은 그라나다는 보이는 거라곤 까만 어둠뿐이다. 길부터 건물까지 온통 돌 투성이인 덕에 덜덜덜 몸살을 앓는 캐리어만 살아있다고 온몸으로 소리 내며 항변해 댄다. 조용한 그라나다 마을, 등장부터 요란스러워 민망할 즈음 불빛이 화사하게 반기는 호스텔에 도착했다.


오랜 역사를 지켜온 돌의 무게만큼이나 차갑던 게 바르셀로나의 숙소라면 그라나다의 호스텔은 온도부터 다르다.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다 맞아준 호스텔 매니저는 스페인 사람임에도 서툰 한국말로 다정하게 반겨준다. 덕분에 피로가 싸악 가신다. 호스텔 숙소에 우두커니 자리 잡은 눅눅한 습기와 쾌쾌한 냄새조차 하등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너그러워졌다. 매니저의 고마운 웰컴 드링크, 상그리아로 입 안을 헹구고 그라나다의 첫 밤을 뒤척이지도 않고 꿀잠에 든다.


그라나다/아트레이지

어둠이 벗겨지니 그라나다 작은 마을의  길들이 눈을 밝힌다. 지난밤 돌길 때문에 몸살 앓던 캐리어 소리에 질색하며 걸어 올라갔던 길인데 이른 아침 우산 하나 들고 내려오는 길은 꽤나 낭만적이다. 카페와 식당들과 잡화점들이 복잡 미묘하게 늘어선 거리엔 끊임없이 이어져있는 돌들조차 웃음을 예약해 둔 듯 활기가 넘친다.


한지에 채색/10호,  알함브라 가는 길/모바일그림

알함브라 궁전으로 향하는 길은 빗줄기로 여간 성가신 게 아니나 아름다움은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 법이니  그냥 걸을 밖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데엔 조금의 성가심이 따르는 건 삶이 우리에게 주는 예의 아니겠어.

한지에 연필과 먹으로 / 30호

비걸음에도 알함브라의 아름다움은 숨겨지지 않는다. 정원의 아름다움은 상상초월이다. 잘 다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들 사이로 유니콘이 불쑥 튀어나올 듯하고, 물 위에 떠오른 또 다른 풍경 또한 신들의 궁전이 분명했으며 이 아름다운 곳이 얼마 전까지 도둑들과 노숙자들의 소굴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경건하다.


궁전 안 작은 공간마다 감탄사를 연발케 하는 오묘하게 세밀한 장식들은 그림의 아름다움은 그림의 풍부한 의미와 셈세함에서 비롯된단, 내 이름은 빨강 책 속 이슬람의 세밀화가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이슬람 술탄의 여름별장이라는 헤네랄리페 궁전의 메인, 하세키아의 정원에 이르러서는 대리석 수반에 물과 비가 함께 떨어지는 소리에 아름다움의 통증이 폭발하고야 만다. 후궁과 사랑을 나누던 정인을 무참하게 죽여 그 피가 온 궁전의 분수대를 물들였다는 궁전에서조차 아름다움은 핏빛으로 수채화를 그려낸다.


옷과 신발이 무거워질 무렵이 돼서야 멈춘 비 덕에 신발을 끌고 다닌 길이었으나 아름다운 그림 안을 잠깐 거닐었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내 삶을 온전히 잠식한다.



바르셀로나에 이어 그라나다에서도 유로자전거나라로 달빛 산책을 한다. 달빛이 부서지는 아홉 시에 이사벨광장에서 모여 알바이신 지구골목 대탐험, 산 니콜라스 전망대를 둘러보고 밤 열 시에 동굴 플라멩코 관람한 뒤 열한 시에 투어 종료다.


어둠이 모든 걸 삼켜버려도 빛을 잃지 않을 그라나다의 밤은 반짝이는 빛과 은은한 달빛이 교차하여 애틋한 연리지를 만들어낸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충만한 삶을 그저 즐기는 거라고 윙크하며 가르쳐주는 뜻을 알아챈 덕에 충분히 즐기는 유로자전거나라 그라나다 달빛 산책이다.


열 시가 돼서야 미셀 오바마가 구경하고 간 뒤에 백악관에 초대해서 공연했다는 유명한 집시가족의 공연 초대를 받았다. 무릎과 무릎이 닿는 거리에서 보고 즐긴 플라멩코는 내가 만난 최고의 열정이다. 스토리를 따라가는 재미와 정열적인 춤과 기타 연주를 이끄는 집시여인의 노랫소리, 그리고 고혹적인 집시여인들의 육감적이며 볼륨 넘치는 몸매에 충분히 반했다. 의외로 할머니 급 무희일수록  더 아름답다. 한국이라면 뚱뚱하다고 여길만한 몸매인데 정열 대신 관록의 기교가 아주 매력적이어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절정을 건너온 연륜은 존재만으로도 채워지는 법이니.


아, 그라나다에선 누구나 초승달로 떠서 아름다움과 한통속이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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