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꿈 2
언제부터 왜 글을 쓰고 싶었는지 명확히 기억나는 지점은 없다. 20대 초반 나름의 굴곡을 겪고 약대에 진학하면서 마음에 여유가 찾아들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굳건히 뒤를 지켜주시는 부모님 덕에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한 적이 없었음에도 언제나 나는 이 한 몸 건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안정적인 진로가 정해지고, 세상에 나가 무시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토대를 마련했음을 몇 차례 체감하고 나서야 점차 두려움이 희석되었다. 마지막 순간, 어느 때라도 비빌 수 있는 언덕 하나를 확보한 후에야 비로소 얻은 여유와 안정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찼던 자리를 대신 메꾼 것은 그리 낯설지 않은 물음이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현실에 밀려 늘 뒤로 제쳐놓았던 질문이 나를 다시 찾았다. 눈앞의 생활과 동떨어진 어떤 것, 이를테면 자아 성취, 자아실현과 같은 종류 말이다. 생계와 상관없이 흥미 본위로 해보고 싶은 일이 퐁퐁 샘솟았으니 비어있던 공간은 서서히 다른 것들로 채워졌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과 상담 중에 글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글이 내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눈앞의 타인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자 여러 겹의 껍질 아래 숨겨져 있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이유는 글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 내가 나인 이유. 내가 나이고자 하는 이유. 글은 나의 모든 이유를 설명했다.
다른 어떤 것을 할 때보다 어느 누구와 있을 때보다 오직 글을 쓸 때, 그렇게 글을 통해 나를 말하고 표현하는 데서 나를 찾고 인식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느라 고심하고 생각하고 나에게 집중함으로써 나에 대해 더 알아갔다. 그리고 나를 더 알아갈 때의 쾌감은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처음 간 음식점에서 맛이 없는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 그러려니 하면 될 텐데 굳이 꼭 이건 너무 달고, 너무 시고, 너무 비리고 등 이 음식이 왜 맛이 없는지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소상하고도 세세히 말하고픈 욕구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식이다.
자질구레한 일 하나마저 옆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거나, 시시콜콜한 생각 하나하나에 동의를 구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저 내 눈에 들어오고, 인식하고, 느끼는 많은 것을 그저 삼켜내려니 도무지 참아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맛없는 음식을 굳이 맛없다고 입 밖으로 한 번 더 꺼내봐야 음식 맛이 좋아질 리 만무하며, 식사시간 기분만 잡칠 뿐이다. 여기 말고 다른 음식점에 가면 어땠을까, 오늘은 외식할 날이 아닌가 봐, 다음부턴 오지 말자 등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도 때는 늦어 지금 이 순간 맛없음을 상쇄할 방도는 없음이다.
애써 실망을 숨기는 참에 옆자리에서 맛없다는 투덜거림이 들려온다면, 더군다나 (하필 맛없어도 참고 있는) 나에게서 동의의 말을 아주 쉽게 얻어내고도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맛이 없는지 미주알고주알 표하길 주저치 않는다면, 안 그래도 저조하던 기분은 더 나빠지기 십상이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내 부정적인 감상이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부정적 자극을 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지겨운 반복에 어쩌라는 건가 싶고, 대충 먹고 얼른 나가자는 생각이 들뿐이다.
그럴 바에야 그나마 있을 음식점의 장점을 찾는 게 좀 더 정신건강에도 좋을지도 모른다. 음식은 맛이 없지만 종업원은 친절하다든지, 인테리어는 예쁘다던가. 식기가 청결하다던가.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조용하다던가. (이 중 하나는 걸려야 할 텐데)
아니면 차라리 빠른 포기가 마음이 편할 수 있다. 이미 난 여기 있고, 다음엔 안 오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깔끔하게 맛을 포기하는 것이다. 배를 채우는 것에 목적을 두면 그럭저럭 참아낼 만한 일이다.
음식점이야 사소한 예시일 뿐이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때와 장소에 맞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고,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티끌만큼 발현된 사교성을 기반으로 잘하진 못해도 최소한의 선은 넘지 말자 싶었다. 그러나 사회에서 보내는 다수의 암묵적인 시선을 고려하기에 내 눈치는 하잘 것 없었고, 정도를 모르는 나는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그럴 필요 없는데) 과도하게 자기 검열을 하기 시작했다.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명제가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집단의 눈치를 보며 그때의 상황에 따라 짜깁기 한 논리는 합리적이지도 일관되지도 않았으나, 나도 모르는 사이 이를 맞추는데 급급했다.
무엇보다 솔직한 내 생각과 마음은 이 세상에 허락되지 않는 거라 생각해서 (무슨 비극적 사랑도 아니고!) 자유롭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답답했다. 무엇이 두려웠냐 하면 나는 말을 꺼냈을 때 돌아올 시선이 겁이 났다.
지금껏 왜 글을 쓰고 싶은지에 따로 골똘히 고민해 본 적 없는데, 왜 그런가 보니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웠던 탓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하지 못한 것은 그 누구도 막지 않았으나, 스스로 하면 안 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든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지라 세상에 소리치고 싶었다. 뭐 그리 억누르고 살았다고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 못한다 하니 더 하고 싶었다. 표할 길 없는 내 안의 답답함을 풀 방법을 찾던 중 익숙함을 쫓아 발길이 움직였다. 내 안의 구멍을 채워 줄 방안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나를 이야기하고, 표현하는 글쓰기.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나의 성역. 타인의 생각과 자기 검열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찾은 것이다.
아동용 만화로 시작한 독서는 그림이 없어지고, 작은 글씨가 빽빽하게 한 페이지를 채우며 진정한 활자의 세계로 진입했다. 수필, 시, 과학, 인문 등 접하는 분야는 넓어져갔지만 기본 취향이 어딜 가지 않아서 나는 소설을 주로 읽었다.
소설 속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곧잘 빠져들었다. 재밌었다. 도리어 이야기가 없는 현실이 무의미하고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 본질은 스토리에 있었다. 활자 중독처럼 나는 글자가 있다면 도로의 표지판도, 길가의 상호도 놓치지 않고 읽어 내렸다. 파란 하늘, 시원한 공기, 맛있는 음식 냄새, 옆에서 들리는 말소리 등 길을 가다 마주치는 여러 자극들 중 내 선호는 단연 문자를 향해 있었다.
소설은 한 사람의 창작물이다. 글쓴이의 경험을 서술한 수필, 여행기 등과 달리 소설은 작가의 상상이며, 허구의 산물인 것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언제 재미나게 소설을 읽었던 마냥, 소설은 다 가짜라 극단적으로 생각하여 멀리한 적이 있다. 몸이 자라고, 머리가 굵어지고 그러고 나서도 꽤 시간이 지나 학교 외의 세상에 대한 관심이 커질 즈음이었다.
소설이 다 가짜라 여긴 까닭은 제아무리 등장인물이 많이 나와도 결국 이를 서술하는 작가는 한 명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다양한 사람이 등장한다 한들 작가 한 사람의 사고 범위를 결코 넘어서지 못할 테고, 제각기 다른 등장인물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행동을 나타내는 데 한계가 있을 터였다.
한 사람의 한계로 가득 찬 세상이 재미는 있을지언정 진실되지 않다 여겨졌다. 현실에 비켜서서 한 사람의 상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모양 빠져 보이기도 했다. 자존심이 상한다 해야 하나. 진짜도 아닌 인위적으로 짜인 이야기에 농락당한 것 같아 마땅찮은 마음이었다.
가공한 세상이 아닌 날 것의 현실이 궁금했다. 궁금한 게 많았다. 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저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책을 멀리하고, 실제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꼬박 1년을 매일매일 사람을 만나며 보냈다. 각자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내부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의 본질이 궁금했다. 내가 품은 질문에 해답을 찾는 시간이었다. 나를 막는 것은 없었다.
내 생애 가장 외향적이고 또 사교적이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과거에도 현재도 늘 일관된 결과를 보이는 MBTI 가 이 시기엔 다른 결과를 보였다. (일시적으로 변하기도 한다더니 정말 그랬다) 새롭게 생성된 내부 에너지가 나를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잠도 별로 오지 않아서 늦잠 자기 일수인 내가 여러 개의 알람 없이도 아침이 되면 저절로 눈을 반짝 뜨곤 했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1년이라는 한정적인 기간이지만 나 아닌 타인에게 깊은 탐구심을 가진 시기였다. 나에 대한 관심이 저변을 넓혀가 타인에게 닿았다. 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왜 그렇게 생각할까? 우린 무엇이 다를까?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궁금했다. 나와의 차이점을 알고 싶었다. 더는 책 속의 인물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 실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실속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답을 이런 식으로는 결코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궁금해한 여러 사항은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서는 쉽게 파악할 수 없었고,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답을 얻을 수 없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나는 한 개인의 중요하고도 내밀한 사정을 알고 싶었는데, 책 속에서 속속들이 가감 없이 그려져 손쉽게 얻어냈던 개인의 정보가 현실에서는 당연하게도 불가능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책이 보여주는 것처럼 세세한 사항을 친절히 알려주길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홀로 가진 내적 친밀함으로 (어쩌면 무례하게) 대뜸 발부터 디디고 봤다는 것을 당황 혹은 거절을 표하는 상대방을 마주하고서야 알았다. 고작해야 안면을 익힌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터놓을 이야기가 아니었음이다. 정말 친하더라도 얼마든지 말하기 꺼릴 수 있는 영역이었다.
개개인의 중심에 닿는 이야기는 나와 시간을 오래 보낸 몇몇에게서 얻을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대화 중에 마음의 빗장이 풀어져 자신도 모르게 떨어져 나온 조각이었다. 온전한 전체가 아니음에도, 나는 몇 없는 성과를 귀한 책을 개인 서고에 고이 모셔두듯 주섬주섬 모아 소중히 간직하기로 했다.
소설은 현실 속의 잔가지들을 다 쳐내고 중요한 특정 사건을 다룬다. 여기서 특정 사건이란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와 관련이 있다. 작가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를 위한 사건을 전개해 나간다.
이를 인위적이라 여겨 멀리했으나, 달리 보면 필요 없는 소음을 없애고 메시지를 명료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작가라는 한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비롯하여 정말 하고 싶은 말, 그때의 감정 등을 인상 깊은 사건으로 녹여낸 알맹이 중의 알맹이. 정수 중의 정수인 것이다.
소설 속의 이야기는 허구일지언정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그 무엇보다 순도가 높다. 작가는 그 하나를 위해 온 성심을 다해 하나의 글을 완성한다. 이보다 더 한 사람을 깊게 알 수 있을까. 이보다 더 자상하고 명료할 수 있을까?
타인을 향한 관심. 인간에 대한 호기심은 단순히 얇고 넓게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는 충족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활자의 세계로 복귀했다. 은밀한 사정을 낱낱이 알고 싶은 마음은 일견 관음적인 구석마저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더는 내 이야기를 말하기를 참지 못했다. 글 속에서 나는 자유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