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꿈 3
'예술하는 사람' 하면 떠오르는 고착화된 이미지가 있다. 무릇 작가란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자신의 기세를 떨칠 것만 같다.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공모전도 별 어려움 없이 통과하고, 충만한 재능으로 깐깐한 심사위원의 눈에 들어 평탄히 입상할 것만 같은 것이다.
이런 천재성과 거리가 있을지언정 유사한 과정으로 등단한 작가가 어딘가 있을 터인데, 내 눈에 당최 띄지 않아 작가란 나와 거리가 먼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존재로 여겨졌다. 도시 속에 홀로 뚝 떨어진 한 마리 학처럼 이질적이고, 익숙하지만 비일상적인 존재로 말이다. 그래서 작가라는 말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려보다가도 나는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든 나머지 꿀꺽 삼켜버리곤 했다.
괜스레 씁쓰레한 기분을 뒤로하고 나는 어려운 작가가 되겠다 어설피 기웃거리기보다 내 안의 말을 자유롭게 쏟아내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원 목적대로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를 목표로 삼으면 그리 복잡할 것도 어려울 일도 없었다. 지레 부담감에 짓눌리지 않고, 아우성치는 내부의 소리를 성에 찰 때까지 적어내리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타고난 재능과 별 관계없는 행위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글쓴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작가와 글쓴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따르면 작가는 '문학 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이다. 예술품의 범위를 글로 한정한다면, 작가와 글쓴이 사이에는 '쓰는 사람'이라는 명확한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에 집중해 본다면, 작가라 인정받기에 상업적 성공, 금전적 이익, 인지도 등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글을 쓴 결과물을 실물 책으로 손에 쥐느냐 아니냐, 즉 출판의 유무라 생각했다.
작가의 길을 오르지 못할 산처럼 여겼던 건 다른 무엇보다 내가 쓰는 글이 출판이라는 장벽을 넘기 불가능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요즈음 장르소설은 카카오 페이지, 네이버 시리즈 등 핸드폰 앱을 통해 많이 읽는 관계로, 실물 책의 유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실정이다. 종이책의 발행은 더는 필수적인 사항이 아니며, 한 번 읽고 마는 킬링타임용 글(두 번 세 번 찾아 읽지 않는다)을 실물 책으로 세상에 내놓는 일은 애초에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장르소설은 주로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으로 읽기 때문에 가독성이 좋은 간결한 문장을 선호한다. 글자 크기가 커지고, 글자 수가 줄어든다. 문장이 단출해지는 만큼 장르소설은 종이책으로 출판되는 다른 분야의 글에 비해 진입장벽이 현저히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독자는 물론, 작가의 입장에서 또한 진입장벽이 낮아지기 때문에 누가 얼마의 품을 들여 쓰느냐에 따라 작품의 수준이 널을 뛰기도 한다. 쉽게 읽히다 못해 빈약한 문장으로 인해 '나도 쓰겠다, 개나 소나 작가가 된다'라는 식의 성토 글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재미를 우선하여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읽던 나는 일찍이 장르소설을 접했다. 한발 더 나아가 개인이 사비로 직접 책을 내는 자가출판 글도 많이 보았는데 로맨스, 판타지, SF, BL 등 주류가 아닌 마이너한 장르의 글은 서점을 통해 유통되기보다 인터넷 상이나 자가 출판물로 접하기 쉬웠던 탓이다.
되려 인지도 있는 출판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발행된 작품을 찾는 쪽이 더 힘들었는데, 아마추어가 취미로 쓴 글로는 순수문학에 익숙한 출판 관계자의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특유의 짧은 호흡으로 전개되는 장르소설은 기존 출판사의 눈에 차지 않았을 테고, 출간이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은 내 눈에도 정말 종이가 아깝게 여겨지는 글도 있었으니 말이다. 넓은 독자층에 비해 장르소설은 상품성을 가진 한 분야로 인정받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뭐 그리 대단한 글을 바라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대단히 짜임새 있는 글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비주류 장르에 심취한 사람들은 읽고 싶은 글을 읽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였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글을 썼다. 나는 이미 조성된 집단에 중간에 유입된 (특정 장르의) 일개 독자였기에 모든 역사를 알지 못하지만, 시작은 대략 이러한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이 상용화되며 특정 장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온라인상에 모이기 시작했다. 몇몇 사이트를 거점으로 비슷한 취향의 글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모여 (읽고 싶은 글이 시중에 없기에) 자급자족용 글을 썼다. 사람이 모이고, 글은 쌓여가며, 쌓인 글로 인해 또 사람이 모인다. 작품이 늘어날수록 신규 독자의 유입도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였다.
기성작가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글을 같이 읽고 나누기 위해 온라인 상에 글을 올린 사람 중 일부는 작가로 취급받기도 했는데, 글을 꾸준히 올리다 보니 '읽는 자'보다 '쓰는 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무게의 추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독자인 사람, 작가인 사람, 독자이자 작가인 사람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실상 구분은 무의미했다. 역할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었고, 독자와 작가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독자도 얼마든지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소비자로 입문한 사람 중 일부는 자체 생산자가 되었다.
집단은 더 진화했다. 작가의 정체성이 강한 일부는 여러 사람의 응원 속에 성실히 연재를 이어가고, 글을 완성하면 소량 인쇄하여 나눠 읽기도 했다. 말 그대로 자가출판이었다. 처음엔 자축의 개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일한 취향을 쫓아 모인 비밀의 화원에 잠재적인 수요는 무궁무진했으니(그에 비해 공급은 적었으니), 글을 쓰는 행위는 손쉽게 자가출판으로 이어졌다.
단순히 글을 쓰는데 목적을 두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가출판이 자리 잡기 시작하자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은 작가들은 실물 책을 내는 것을 당연시 여기기도 했다. 처음부터 출간을 목적으로 글을 게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작가와 작품의 인기에 따라 인쇄 부수의 차이가 있을 뿐 전반적인 시스템은 동일하게 굴러갔는데, 정해진 수량을 소량 찍어서 발송하는 식이었다. 자유롭게 글을 쓰고 완결을 내면 (종이책을 원하는 사람에게) 미리 예약을 받는다. 책값을 입금을 받은 후, 정해진 수량만큼 책을 찍어내니 작가 입장에서 금전적인 부담도 크지 않았다.
많은 책을 샀고, 읽고, 되팔았다. (정해진 수량만큼 소량 인쇄한 책은 언제 다시 구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한정판이 되기 마련이었는데, 그로 인해 사이트 내 중고거래가 활성화되었다)
많은 독자가 작가가 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독자와 작가의 경계가 불분명한 이곳에선 독자가 작가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한때의 작가가 자연스레 다시 독자가 되기도 했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었고, 누구나 책을 찍어낼 수 있었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 작가가 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경험적으로, 내 글을 실물 책으로 가진다는 것 또한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모두 독자였을 뿐이었다. 나도 독자지만,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누군가는 내 글을 읽을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되고, 장르소설의 상품성을 새로이 인지한 이들로 인해 웹소설 시장으로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었다. 각자의 취향을 쫓아 모였던 소소한 자급자족의 세계는 고스란히 웹소설 시장으로 대체되어 버린 듯하다.
카카오 페이지, 네이버 시리즈 등 웹소설 연재 플랫폼의 출현으로 물밑에서 활동하던 온라인 사이트들은 현재 더는 활발히 운영되지 않으며 교보, 예스 24, 밀리의 서재, 리디북스 등 전자책 시장의 발전으로 독자들은 원하는 장르의 글을 보다 손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만의 소규모 리그에서 글을 쓰던 작가들은 음지에서 양지로 터를 옮기면서 공식적인 수익 구조 아래에 서게 되었다. 이전보다 더 쉽게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작가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줄 창구를 얻게 된 것이다.
내가 쓰는 글은 전형적인 장르소설은 아니지만, 크게는 소설의 범위에 속하고 세부적으로 따지면 (그나마) 장르소설에 가깝다. 이때껏 나와 가장 가까웠던 건 순수문학일 테지만, 그렇다고 내가 한 길만을 걸어왔던 것은 아니다.
과거 자발적 모임으로 활성화된 사이트를 통해 나도 글을 완성한다면 얼마든지 자가 출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최근 장르소설의 경우, 공식적으로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통로(웹소설로 연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넓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두 경우를 생각해 보면, 단지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목적으로 글을 쓰는 나도 얼마든지 가능성 해 보였다. 뭐가 되든지 간에 말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격언이 있다. 영어로 된 문구인데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라는 문장이다. 엄마는 이 문장을 어릴 때부터 부쩍 나와 언니에게 주입하듯 반복하여 설파했는데, 나는 이 말이 그렇게 좋으면 엄마나 따라 하지 왜 본인은 하지도 않으면서 나한테 그러나 내심 반발감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이 다 한다고 내가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것도 아닐 텐데 내가 하고 싶지도 않은 일에 불필요한 경쟁심을 조장한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훗날 이 말뜻을 몸소 체감하게 되었으니, 이 격언이 괜한 비교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의욕을 고취시키고 투쟁심을 불러일으키는 응원의 일종(또는 격려의 또 다른 표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수집욕이 있었다. 읽고 좋았던 책을 전부 소장하지는 못해도 내 마음에 들어온 작품과 작가는 기억 저편에라도 남겨두려 했다.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보거나, 새로운 소식을 따라가기 위해서였다. 좋은 책은 많고, 재밌는 책도 많지만 내 취향에 꼭 맞는 책을 찾기란 은근히 어려운 법이라서 나는 이런 방법을 선호하곤 했다. 마음에 드는 작가를 기억해두고 신간이 나오면 총총 뒤따라가는 것이다.
독서를 어린이용 만화책으로 시작해서인지, 만화책을 참 좋아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학교 앞 만화책 대여점을 시시때때로 드나들었는데, 책과 마찬가지로 만화책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하면 꼭 한 번 더 눈에 새겨두곤 했다.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봐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
성인이 되고 글쓰기에 마음을 둘 때쯤 우연히 한 만화책을 보았다. 한 권 한 권 나올 때마다 어찌나 홍보를 하던지, 본 적은 없어도 작품의 존재를 인식한지는 제법 오래됐을 무렵이었다. 광고를 보아하니 딱히 끌리는 그림체도 아니고 내 흥미를 자극하는 줄거리도 아니었다.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어라, 내용이 너무 좋은 거다. 오랜만에 '내가 애정 하는 도서 목록이 업데이트되겠군' 무심히 생각하는데, 무심코 지나친 그림체가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었더랬다. 작가명을 얼른 살펴보니 발음이 쉽지 않고, 보고 또 봐도 곧잘 기억에서 휘발되는 발음이 어려운 일본어였지만(일본인 작가였다),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듯 낯설지가 않았다. 곧바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언젠가 '이 작가 좀 괜찮네 ' 하고 눈여겨보고 지나쳤던 작가였다.
작가의 예전 작품에 대한 감상은 또렷하지 않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억은 '소장하기 싫은 수준은 아니지만 굳이 갖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든다' 정도랄까. 그에 비해 새로 나온 책은 이전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너무 좋아서 '이 작가가 이 정도였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놓칠 리 없는데. 이 작가를 내가 결코 잊을 수 없었을 텐데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정갈한 그림체는 보면 볼수록 예뻤고, 내용은 세련되면서도 정제되어 있어 잔잔한 문학작품을 읽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용이 잊힐 때쯤 시간 텀을 두고 이따금 씩 꺼내 읽어도 읽을 때마다 좋았다. (역시 인기 있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구나)
왜 진작 읽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래전 발간된 구간을 일부러 찾아 다시 읽어보았다. 오랜만에 읽은 작가의 초기작에도 내가 홀딱 빠져버린 작가 특유의 매력이 희미하게나마 반짝이고 있었다. '아,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내가 이 작가를 흐리게라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읽어도 읽어도 좋았던 신작에 비해 아무래도 서투르고,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칼로 비유하자면, 충분히 갈지 않아 날이 뭉툭하여 본인이 가진 날카로움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랄까. 바위 안의 광물이라면 충분히 제련하지 않아 아직 빛을 흩뿌리지 못하는 미완의 보석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으니, 기억하려 했으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이유가 이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나는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최근작과 함께 구할 수 있는 작가의 전작을 전부 구매했다. 최근작은 '꼭 사야 해' 하는 마음이었고, 구작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신작과 함께 라면 비좁은 책장 자리를 비집고 모셔두기 아까울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출간일 순으로 책을 나란히 놓아두면 시간에 따른 작품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최근작이 만들어지기까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모든 책들이 그 작가의 이름으로 묶인 하나의 작품으로 보였다.
경이로웠다. 한 권 한 권을 완성하며 경험을 쌓고, 경력이 쌓이면서 작가는 나아지고 있었다. 칼날을 차근차근 갈아가다 어느 순간 몇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누가 봐도 시선을 붙잡히고 마는 빛나는 작품을 그리게 됐다. 원석을 캐고 연마하여 자신 안의 보석을 꺼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도 이런 작품을 그리고 싶었다. 나도 조금씩 나아져 언젠가 내 마음에 꼭 드는 내 취향의 글을 쓰고 싶었다.
장르소설 계에서 유명한 작가의 책을 꾸준히 쫓아 읽었다. 솔직히 나는 그 정도인지 모르겠는데, 일반 팬은 물론이요 열성팬도 많아 거의 아이돌에 필적하는 인기를 자랑하는 인기 작가 중의 인기 작가였다.
현실 생활을 하면서, 어찌 이리 성실히 글을 쓰나 (과연 가능한가) 싶을 만큼 부지런히 작품을 매년 (적어도) 하나씩은 꼭 선보였다. 꾸준함에서도 드러나듯, 작가는 글에 대한 애착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을 담은 글을 썼다.
이 작가의 수많은 글이 모두 다 내 취향에 들어맞는 건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모든 글이 한 번쯤은 읽어볼 만했다. 장르소설 답지 않게 매번 생각해 볼 만한 구석이 하나씩은 있다는 점 또한 대단하게 다가왔다. 다른 기대 없이 오직 재미만을 위해 읽는 글에서 교훈까지 얻는 데다가, 일상생활 중에도 문득문득 생각나기도 했던 것이다.
이 작가가 낸 몇몇 작품 중 유독 내 취향인 글이 있었는데, 재미는 물론이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까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이 작가의 수많은 팬들에게 뒤늦은 동의를 표하며, (역시 인기 있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구나) 같은 책을 잊을 만하면 꺼내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읽던 어느 날이었다. 별안간 이 작가의 여러 글 중 특히 인기 많은 글인 첫 작품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이 치밀었다.
장르소설은 소재와 문체에 유행을 타는 경향이 있어서 구작은 잘 읽지 않지만, (실망하기 일쑤다) 그를 깨고 예외적으로 읽어보기로 했다. 이 작가의 처음이 궁금해질 만큼 신작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첫 작품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끈 워낙 유명한 작가였기에 나도 이전에 첫 작품을 이미 읽어본 적 있는데, 어렴풋하지만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처음 쓴 글을 보았다. 지금도 그래, 이번에도 역시 재밌었다. 재밌게 읽었다. 그러나 미숙했다. 눈에 띄게 서툴러서 이 사람도 이렇게 헤맸던가 싶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글을 쓰는 이 사람도 이렇게 처음인 티 잔뜩 내면서 서툴게 글을 썼구나. 낯설었다. 첫 작품임에도 그 작가 특유의 매력이 살아있었으나, 내가 아는 그 작가가 아니었다. 힘들게 구한 구작을 읽고 난 감상은 한마디로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러하기에 희망적이었다.
내가 애정 하는 작가의 초기작을 보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들의 처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몰랐고, 나와 마찬가지로 그저 좋아했을 뿐이고, 나와 마찬가지로 좋아서 시작한 보통 사람이 그렇게 쓰다가 쓰다가 긴 시간 계속하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어느 순간 성큼 나아가 내 마음을 흔드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꾸준히 글을 쓰고 책을 낸 것만으로 말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 사람의 흔적을 따라가며 이런 사례를 내 눈으로 목격하고 나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십여 년에 걸친 작품을 보면 나아가는 게 보이거든. 그럼 정말 또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면 나도 하고 싶으니까. 나도 할 수 있으니까. 나도 십 년을 해낼 수 있으니까. 정말 하고 싶다는 생각. 나를, 내 글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 마음을 나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자신만만했다. 마음을 두고 시간을 쏟는 거라면 할 만하지 않은가. 내가 하기만 하면 됐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젠가 이룰 수 있는 일로 여겨졌다. 정말 자신 있었다. 내가 글을 쓰기만 한다면, 나도 나아질 수 있었다. 나라고 나아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