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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약 Oct 05. 2022

편두통을 숨기는 이유 4 - 약점이 된다

앞선 글과 이어집니다.













말하지 않는다




두통으로 힘들어하길 수년째. 나는 매일 편두통(예방) 약을 먹는다. 진단 이후 쭉 대학병원에 다니고 있으며, 꾸준히 한의원을 다니며 침도 맞는다. 통증 때문에 우울증이 생겨 정신과도 가고, 상담도 받아보고, 두통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적도 있다. 

하다 하다 안돼서 현재는 임상약을 복용 중이지만 그래도 나는 '두통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 모든 선택의 기본 뼈대이자, 무엇보다 가장 먼저 우선으로 고려하는 요소이지만 나는'두통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나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해서? 내가 겪은 두통은 대부분이 아는 그 두통이 아니기 때문에?

물론 그런 생각이 없진 않지만, (아니 그랬던 적도 분명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 적당한 표현의 중요성을 인지한 현재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시키려 노력할 수 있고, 혹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말을 꺼내볼 순 있다. 내가 나를 표현하겠다는데 어느 누가 무슨 권리로 나를 저지하겠는가. 받아들이는 게 청자의 몫이듯, (상대가 듣든지 말든지 간에) 표하는 것은 오로지 화자에게 달려있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내가 말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면, 차라리 반대로 접근해 보라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나에게 왜 말하지 않냐 묻지만, 세상에 말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이 앞에 '굳이, 애써'라는 말이 붙인다면 금상첨화로 보다 명확히 내 뜻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애써,




말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약점이 된다




나는 현재 진행 중인 내 통증을 타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좋은 이야기가 아니니까? 굳이 널리 알릴 만한 일이 아니라서? 물론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아프지 않다는 행복한 착각에 빠져 있어서도 아니었는데, (통증이 익숙한 나머지 아무리 경각심을 잃었다 해도) 입원까지 하고 온 바,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심각성을 처음부터 인지하진 못했다손 치더라도 통증 자체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항시 느껴지는 감각을 모를 수 없다. 


만약 말했다면, 선량한 주변 여러 사람들에게 배려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프면서 안 아픈 척, 괜찮은 척을 했다. 편두통 환자가 편두통을 숨기는 데 저마다 여러 복잡한 사연이 있겠지만, 나로 말하자면 아마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약점이 되리란 걸.


생각해 보면 입원 전에도 입원 후에도 언제나 똑같았다. 못내 내 건강 상태를 걱정하면서도 나는 아픈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프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없이 손쉬운 약점이 된다. 하자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어 손쉽게 페널티를 받는다. 어디에서의 페널티냐 하면 바로 경쟁에서의 페널티다. 














짧게 일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한동안 쉬어야 했다. 미력하게나마 일상에 복귀할 수 있다 여겨졌을 때 나는 곧장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증명하고 싶었다. 누구를 향해선지도 모를 (아마 나 자신을 향해서였겠지만) 괜찮아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했다. 아프기 전이라고 하루 종일 일하지도 않았을뿐더러 (파트도 하고 풀타임도 하고 변동이 있었다) 긴 시간 일하기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파트라도 주 2-3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게 일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매일 하루 4시간씩 짧게 일하기로 했다. 한 번 출근해서 오래 일하는 게 효율적이지만, 그보단 짧게 일하는 게 안심이 됐기 때문이다. 

언제 갑자기 손쓸 수 없이 아플 경우를 상정했다. 그럴 때 비교적 짧은 4시간만 버티면 집에 올 수 있다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남에게 말할 때 




중간에 일을 그만두고 쉬기도 했지만, 다시 일을 구해도 짧게 하루 4시간만 일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길게 일하면 힘이 드니까. 

과거에는 글을 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짧게 일했는데, 현재는 두통 때문에 짧게 일한다. 이유가 다르고, 내 몸 상태도 다르지만 밖에서 보기엔 같다. 드러난 결과만 본다면 그렇다. 


아프기 전에도 종종 파트로 일한 적이 있어서 엄마 주변 사람들은 내가 그냥 체력이 약해서 짧게 일하는 줄 안다. 이런 나를 보고, 약사가 시간을 유동적으로 쓰기 참 좋다며 부러워하기도 하고, 또 돈을 많이 안 벌어도 되니 몸이 약한 자신의 딸도 건강을 챙기면서 편하게 조금만 일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엄마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는다. 별다른 첨언 없이 전화기 너머 상대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는 걸 보면 이런 반응을 어느 정도 일부러 유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나도 말하지 않는다. 엄마의 말을 나는 굳이 애써 정정하지 않는다. 가장 주된 이유는 내 인간관계가 아니기 때문이지만, 엄마가 듣기 좋은 말로 나를 가리는 것처럼 나 또한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아프다는 게 약점이 된다는 것을. 이 약점으로 인해 내가 예기치 않게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름을 바꿨다




자꾸 아파서 이름을 바꿨다. 









이름 바꿔보는 게 어때? 









라는 말을 들었는데, 가족이 다 혹해가지고 나도 좀 고민하다 바꾸기로 했다. 


나는 내 것을 아끼는 편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쉽게 버릴 생각을 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개명을 하겠냐는 제안에 덜컥 수락할 마음이 들었다. 세상에 나온 후 내리 불리던 이름을 바꾼다는데, 별 고민 없이 그래 볼까 싶은 것이다. 내 이름을 싫어한 적도 없는데 의외로 아쉽지도, 딱히 미련도 없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이름의 원작자이자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아빠 또한 주저 없이 개명에 동의했다. 종교를 믿는 만큼 미신적인 행위를 기꺼워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원시원했다. 

아빠는 '네가 원하는 거니?' 한 번 묻고는 실은 아빠도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본인도 살 날이 많으면 바꾸고 싶었을 거라면서, 내가 바꾸고 싶다면 바꾸라고 말했다. 


나는 아빠가 아빠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그 와중에 엄마도 본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난 내 이름이 마음에 안 들진 않는데...) 이 김에 온 가족이 개명하면 어떨까 싶었지만, 개명이란 게 웬만한 마음으론 시행키 어렵고 번거로운 바, 나만 바꾸기로 했다.


원작자의 허락과 당사자의 결심이 어우러지자 막힐 것이 없었다. 그 길에 작명소에 연락을 해서 새로운 이름을 짓기로 했다. 

순조롭게 진행이 돼 이름을 2개 받았는데, 목적 있는 이름 변경이니만큼 제일 좋다는 걸로 했다. 처음엔 선택하지 않은 다른 하나에 더 마음이 갔는데, 계속 듣다 보니 내 새로운 이름이 퍽 마음에 들었다.














개명한 사람




필요하지 않는 한 개명했다고 먼저 말을 꺼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인지 이름을 바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개명한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한 명이 오픈한 순간부터 주변에서 찾아보기 더 쉬워지는데, 동병상련의 마음인지 먼저 말한 자에게 쉽게 마음이 열리는 듯하다. 구태여 이름을 바꿨다 말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고 싶진 않은 마음이랄까. 뭐 숨길 일도 아니니까.


이름을 바꾼 사람이라 해서 특별히 미신을 잘 믿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이름을 바꿔서라도 어떤 변화를 꿰차기 위함이니, 살면서 그만큼 뜻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개명 절차가 많이 간소화됐다 하지만 개명 후에도 사소하게 할 일이 많고, 새로운 이름은 스스로도 헷갈리고 낯이 설다. 

그럼에도 개명한 사람을 이토록 쉽게 찾을 수 있는 걸 보면, 간절히 원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이 세상에 많은가 보다. 눈에 잘 띄진 않지만, 티 내지 않고 그렇게 다들 조용히 묵묵히 살아가나 보다. 좀 더 나아지길 바라면서.














개명의 이유




엄마도 나를 닮아서인지 (내가 엄마를 닮아서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자잘한 일상을 공유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 같다. 이번에도 그랬는데, 엄마는 내가 이름을 바꾼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엄마의 몇몇 지인들에게 먼저 말을 꺼내곤 했다. 말하지 않는 이상 내가 이름을 바꿨는지 어쨌는지 엄마 주변 사람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엄마는 개명의 이유를 내 필명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의 선후를 바꾸어서 말한다. 











나는 글을 쓰고 싶고, 


필명을 짓기 위해 작명소를 찾았다. 










작명소에서 우연히 내 본명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고, 그 김에 필명으로 받은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는 사실을 기반한 새로운 스토리를 쓴다.

엄마는 내가 여기저기 자잘하게 아프고, 원래 체력이 안 좋으며, 관심 많고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말로 나를 대변한다. 이렇게 세상에 통용되는 말로 나를 예쁘게 덧칠하는 엄마를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 엄마의 사정과 그리고 나에게 말하는 '아프지만 않으면 돼' 사이의 간극. 


엄마는 말한다.










이름을 바꿔서라도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촌스럽고 이상한 그 어떤 이름으로라도 바꿀 거야 









한 번이 뭐야. 이름을 바꿔 좀 나아진다면 몇 번이고 바꿀 것 같다. 


엄마의 행위가 나를 위한 것임을 안다. 무작위 하게 다가올 페널티를 막기 위함이다. 아프다는 건 부정할 수도 대응할 수도 없는 약점이 되니까. 

왜 먼저 입을 열어 사서 사실과 다른 말을 입에 담는지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미리 변명해두고픈 마음일까?) 내가 엄마를 이리 만들었다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든다.  


나는 이제 글에 그만한 욕심이 없다. 마음이 후련한 판에 내가 한 말도 아닌데 괜히 공수표를 날리는 기분이다. 내가 날리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떤가 싶기도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기에 즐거운 말도 아니다. 

내 이름을 오가는 상황에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은 나는 엄마가 전화 통화를 할 때에는 문을 닫고 사라진다. 자리를 피한다. 원치 않는 소음에서 멀어지고 싶어서.


반복해서 들으면 사실인 것 같고, 익숙해지고, 인이 박힌다. 세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런 게 세뇌지) 요즘 엄마는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글을 쓰냐고 묻는다. 반쯤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 그렇다는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내가 쓰고자 했던 글은 아니지만 나는 이 편두통 일지를 열심히 써볼 생각이니까. 


엄마는 자신의 생각을 현실로 만드는 중이다. 선후가 바뀌었지만, 밖에서 보기엔 같다. 














지울 수 없는 약점




편두통 환자들은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길 꺼린다고 한다. 왜일까. 나와 같은 이유일까? 알 수 없지만, 나는 내 이익을 위해 말하지 않고 숨겨왔고 그래서 숨김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이익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젠 모르겠다. 머리를 굴리고 굴러서 이렇게 오래도록 아픈 결과라면 그냥 하루하루 되는 데까지 열심히 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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