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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약 Oct 04. 2022

편두통을 숨기는 이유 3 - 두통 환자를 향한 무관심

앞선 글과 이어집니다.













보편적 무관심






사람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없다. 

아니, 그냥 아예 없다.

그냥 원래 그렇다.

그런 것 같다.


사람은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타인은 나에게 관심이 없어. 나 말고는. 

아니, 나만큼은. 

나 또한 나한테 두는 관심만큼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관심은 없었다. 


사람은 자기 일에만 관심이 많다.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과 교류하며, 대체로 이기적일지라도 이타적일 때도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두통이 낫는데 필요치 않다 해도






이해하고자, 공유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과 편두통처럼 타인이 이해하기 힘든 감각적 경험의 결합은 나를 향한 무관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들었다. 


만약 감각의 전이가 가능하다면,













으악, 아파!

너 이렇게 아팠어?










내지는, 이러고 어떻게 살아? 


이런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고작 이 정도라 해도 이 고통을 누군가 알아준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 텐데 말이다.


사람은 사람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 두통이 낫는데 필요치 않아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 이해가 필요치 않다고 해도 나는 이해를 바랐다. 


지금 보면 그저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가지는 보편적이고도 일상적인 무관심이다 싶지만 (혹은 적당한 관심일 것이다), 많이 아팠던 그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세상이 내가 아픈 걸 알아주지 않아서 속상했다. 내 세상은 송두리째 바뀌었는데,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홀로 서러운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혼자






나는 섭섭했다. 섭섭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내기에 아쉬울 만큼. 섭섭하다는 말로 표현키 섭섭할 만큼.


다 많이 생각하고 걱정한다고 그랬다. 이를 아냐는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아냐고? 정말 나를 걱정하는지도 모르겠고, 걱정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나를 정말 생각하고 걱정했는지 도리어 묻고 싶기도 했다. 만약 내가 묻는다면, 내 수많은 물음에 뭐라 대답할까?









내가 얼마나 아픈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계속 아픈지


나아지고 있는지











내가 말을 꺼냈을 때 관심 있게 들어준 적 있는가. 

관심을 가지고 물어본 적 있는가. 

내가 아픈 그 수많은 순간, '지금 아프냐'라고 물어본 적 있는가. 

배려해 준 적 있는가. 

내가 아프지 않을 때와 아픈 지금, 나를 대하는 태도에 달라진 점이 있는가.


글쎄, 나는 모르겠는데. 글쎄. 나는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겠는데. 

관심을 가졌을 수 있겠지. 물어보지 않음으로써 귀찮지 않게 배려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배려를 배려로 느끼지 못하겠는가. 진정 무관심과 배려를 분별하지 못하겠는가.


누구도 나를 이해할 의무가 없고, 누구도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당위가 없음에도 나는 이를 구했다. 내가 표현치 않더라도 누군가 손을 걷어붙이고 나서 적극적으로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차마 내가 움직일 힘이 없었기 때문에. 

정작 주변에선 내가 이렇게 아픈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바로 내가 말을 안 했기 때문이었다.


























말하기 꺼리는 이유






각자 생활이 있고, 하루 내내 일터에서 저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오면 얼마나 힘든지 안다. 내가 그랬으니까. 내 일로 가득 차서 다른 이의 힘듦을 슬며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외면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런 경험을 거울삼아 나는 나에게 큰 관심 없는 사람에게 혹은, 상대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주제에 관해 굳이 언급하지 않는 쪽으로 대화의 방향을 선회하곤 했다. 서로에게 불편한 시간이 될 수 있단 생각이었는데, (개개인의 관심을 떠나) 타인의 통증과 병환이 뭐 그리 흥미로운 주제겠는가?


그러나 좀 더 내게 솔직해진다면, 내가 꺼낸 얘기에 무관심한 상대를 봤을 때 돌아올 속상함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어지간히 섬세하다 싶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다) 이처럼 두통 환자를 향한 '무관심'은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표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고립






편두통의 악독한 특징 중 하나는 (물론 출산에 비견되는 심한 통증도 그렇지만) 환자를 고립시키는 것일 테다. 

두통이 발생하면 환자는 죽을 자리를 찾아 떠나는 어느 충성스러운 노견처럼 조용히 혼자 있을 곳을 찾는다. 다른 사람과 대화는커녕 인기척조차 없는 곳을 찾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두통 발작 시 어디 서늘하면서 시끄럽지 않고 어둡고 쾌적한 곳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도 나아지진 않지만 어쨌든 그렇다)


어둡고 조용한 곳을 찾는 두통 환자의 습성은 환자를 고립되게 만든다. 혼자 끙끙 앓는 통에 질병의 악화를 알아차리고 대처하는 시기를 놓칠 수 있고, 동시에 우울증과 같은 또 다른 정신적 질환의 발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두통으로 인해 환자가 느끼는 소외감과 '실질적인 고립'은 이차적으로 환자의 삶에 실재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증명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은 이해받기 힘들며, (이런 류의 문제가 그렇듯) 우리는 종종 증명을 요구받기도 한다. 이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는 동안 두통 환자의 소외감과 외로움은 켜켜이 쌓여나간다.

그러나 환자 주변인들 입장에서 환자에게 정녕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의구심을 가지는 건 일견 타당하다면 타당한 일일 것이다. 두통이라는 증상은 밖으로 내보여 드러나지 않을뿐더러, 많은 부분 (실제로는 거의 대부분) 환자의 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두통이 있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검사는 현재로선 존재하지 않으며, 객관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화자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비단 두통만이 아닌 다양한 통증 질환에서 (현재로서는) 환자가 표현하는 주관적인 사항에 의존하고 있다.


환자의 아프다는 표현과 달리 밖에서 보기에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경우도 빈번한데, 나는







얼굴이 뺀질뺀질하다. 

얼굴에 살이 올랐다. 

혈색이 좋다. 

화색이 돈다.

전혀 아파 보이지 않는다. 

멀쩡해 보인다.







등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안색과 혈색 등 얼굴에 드러나는 어떤 징후는 내 두통과 큰 관련이 없다. 머리가 아프면 내 표정만 구려질 뿐이며, 오히려 이로 인해 (질환이 아닌) 단순한 기분 문제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내 아픔을 믿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왜 나는 가장 기본적인 질병의 여부마저 인식시키기 어려운 빌어먹을 상황에 처해있는가. 

소모적인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한층 더 강화된다. 보이지 않는 사항을 해명하는 일이 쉬울 리 만무하며, 나는 어김없이 상처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겐 또 무슨 잘못이 있는가? 때때로 어느 누구의 잘못 없이 문제는 발생하기도 한다.


























위로를 원한다, 원하지 않는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않아도 가만히 있는 나를 알아줬으면 싶었다. 적극적으로 말을 꺼내지 않아도 관심을 바랐다. 









미성숙한 자아인식 

자아 비대 

지나친 자기 인정 욕구 



혹은, 좌절된 자기표현 








어떤 이름을 붙이더라도 그때는 정말 그랬다. 단지 내가 너무 아프고, 또 많이 지쳐서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힘들 때도 힘든지 몰랐다. 몸이 아프고 아파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고통의 한중간이었다. 스스로를 위로하려 하려 해도 때는 늦어 정작 나를 위로할 힘이 없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저 위로를 구할 만큼 내몰려 있으면서도 당장의 고통이 한차례 나를 휩쓸고 지나가면, 또 그리 쉽게 아무에게나 위로받고 싶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된 통증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괴로움은 인생은 혼자라는 서글픈 깨달음과 함께 외로움을 배가 시킨다. 그때의 나날은 그런 순간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나는 이해보다 배려를 원했다. 이쪽이 그나마 현실적이었다.


시간이 흘러 '아, 내가 그때 참 힘들었겠구나'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나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을 사람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얼마나 힘이 든 줄 알기에. 혼자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니, 그 무엇보다 나에게도 누군가 있었더라면 더 빨리, 더 잘, 더 원활히 어쩌면 지금과는 다른 내가 되어 있을 거 같았다.


























인생은 투쟁











나 많이 아프고 우울해.
힘들어.











근데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말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이해받지 못할 테니까. 아파서 그런 거니까. 그냥 슬프니까.


두통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아프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인정을 받아야 도움을 구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 인식되는 것. 통증을 직접 증명해야 하는 문제 앞에서 나는 이해는커녕 내 두통을 부정당하지 않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하게 됐다. 



내가 왜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안다. 내가 말한다 해서 '그래, 그렇구나' 수긍할 그들이 아니고, 나에겐 투쟁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요구할 힘은 없고,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힘을 내야 하는가?



그러나 생각을 되새기다 보니 그게 잘못됐다는 걸 알겠다.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얘기해야 한다. 투쟁해야 한다. 




내가 아픈 걸 알리는 이 단순한 행위가 설사









날 낫게 해주지 못해도 (당연하지)


대신 아파줄 수 없어도 (불가능하지)


나를 정말 이해하지도, (뭘 얼마나 이해하길 바라는 거냐)


원하는 반응을 돌려주지 않아도 











작은 위로와 배려, 그리고 어떤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밖으로 알려야 한다. 외부를 향한 소통의 창구를 놓쳐서는 안 된다. 


바깥으로 도움을 구한다 해도 첫 시작은 내 손에 달렸다.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내 문제를 알 수 없어서 언제나 그랬듯 내가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내 의지와 힘만이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꿀 아주 작은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내가 될 수 없다는 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나를 외롭게 했다. 언제나 그렇듯, 누구도 내 몫을 대신 짊어질 순 없었다. 


























이해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작 아픔을 고백하자 너무나 손쉽게 배려받고, 이해받는다. 아픔을 숨기기 급급했던 내가 되려 이상하게 여겨졌다. 

정말 내 말을 이해한 게 맞나? 내가 많이 아픈 걸 알고 있는 건가? 내심 의아한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실상 어떻게 봐도 잘된 일이었다. 나를 얼마나 깊게 이해하느냐 보다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어떤 변화가 필요하며, 배려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걸 알리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 말이다.


두통으로 힘겨운 상황을 고백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투쟁의 결과라 하기엔 그냥 말만 했을 뿐이라서, '네가 많이 아프구나, 현상태를 유지하기 버겁구나. 당장 어떤 도움이 필요하구나' 하는 반응과 뒤따라오는 급격한 변화의 물결이 당황스러웠다. 

이게 이렇게 쉬운 일인가 싶었다. (내가 그렇게 말을 안 했나) 이토록 쉬운 일을 나만 어렵게 받아들이고 있었나. 


내가 겪는 고통에 너무 매몰되지 않고, (본인이 아니라면 알 수도 없는 일을)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 무용한 서글픔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그랬다. 아픈 걸 참는 것만으로 힘들더라도 더 빨리, 더 많이, 더 강하게 내 문제를 토로할 걸 그랬다.


이 어렵지 않은 적정량의 이해를 구하고, 그로 인한 도움과 변화를 체감하기까지 나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두통 환자를 향한 무관심과 의구심에 섭섭하고 마음이 상했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이해를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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