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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약 Sep 27. 2022

편두통을 숨기는 이유 1 - 나도 잘 몰라서 그래

하던 대로



갑작스럽게 2박 3일 입원을 하고, 기대했던 정도는 아니지만 한결 나아짐에 안도했다.


퇴원 후 돌아오는 주 토요일, 나는 다시 의사를 만나러 신경과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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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하고 며칠이 지났지만, 외래 진료를 가는 토요일이 될 때까지 (점차 나아질 거라 여겼건만) 두통은 그 이상 호전되지 않았다. 토요일 병원 가는 내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병원 뒤편의 작은 약국에 들러 약을 받았다. 한낮의 빛이 약국 내부로 그대로 투과해 들어왔다. 미세한 먼지 입자들이 공기 중을 떠다녔다. 

정신이 몽롱했다. 밝은 햇빛과 따뜻한 공기가 답답하게만 여겨진 건 내가 이상한 탓이겠지. 갑자기 밖에 있는 게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힘이 들었다.


얼른 집에 돌아가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었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조금 쉬다 말고, 그날 저녁 예정된 외출을 감행했다. 일찌감치 정해진 약속이었다. 나는 친구와의 선약을 이행하기 위해 명동까지 행차했다.  


























통증을 숨기려 함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에 누워 친구들과 셀카를 여러 장 찍었다. (웃으며 찍은 사진이 여러 장 남아있다!) 본래부터 1박 2일의 일정이었다.


다행히 운이 따라줬는지, 어디 조용한데 들어가서 눕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낮 시간에 비해 밤에는 그럭저럭 컨디션이 괜찮았다. 머리가 좀 아팠지만, 당장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사진을 먼저 찍자고 말할 정신도 있었다. 아프다는 걸 숨길 수 있을 정도로만 아팠으니, 견딜 만한 날이었다.


저녁 식사를 할 때쯤 더 강하게 아파져 고비가 있었지만, 어렵사리 한고비를 넘기자 어쨌든지 간에 내가 지금 아프고, 아팠던 사실을 친구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다고 나는 믿었다)

통증을 인내하느라 어쩔 수 없이 말 수가 줄어들었지만, 나중에 만회하면 그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친구들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했다.


약속을 취소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미쳤지 정말) 나는 이때껏 하던 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내가 왜 바뀌어야 하는가?






나는 완고했고, 미래를 낙관했기에 그럴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알리고 싶지 않아



다음 날이 되자, 솔직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내가 일어났을 땐 친구들 모두 이미 깨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늦게 일어나는 거야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다만 아침에 눈을 뜨기 전부터 두통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느릿느릿 움직이면서도 상황이 더 나빠질까 우려스러웠다.


그 뒤론 걱정했던 대로였다. 오전 브런치로 핫케이크를 먹을 때, 궁궐로 이동해서 산책을 할 때, 구경을 끝내고 근처 카페에서 쉴 때, 그 모든 순간 아찔한 머리 통증이 함께 했다.


식당에서, 고궁에서, 그리고 카페에서 찍은 내 사진을 보면 얼굴이 좋지 않다. 표정이 나쁜 건 물론이고 미관상으로도 그랬는데, 기분 탓인지 몰라도 비대칭이고 얼굴 한쪽 면이 전체적으로 축소돼 보였다.




아침으로 먹었던 핫케잌









그때 사진을 보고 있자면,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다시금 그때의 아픔이 떠오른다. 참 많이 힘들었는데. 참는다고 참았지만,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어감추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확인하고 만다.


























친절한 제안



카페에서 말 수가 줄어든 나를 보고, 한 친구가 말했다.











너 말 수가 확 준 걸 보니 몸이 안 좋은 거 같다.

머리가 아프면 먼저 가는 게 어때?









다른 친구들도 나에게 괜찮냐고, 먼저 가겠냐고 물었다. '아프면 얼른 가보라'라는 말은 분명 배려였다. 친절한 권유였다.


그러나 내 입에선 비할 데 없이 단호한 거절이 나왔다. 반사적으로 나온 말은 생각 이상으로 완강했고,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았으며, 번복의 가능성조차 남기지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나는 친한 친구 앞에서 내가 느낀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서, 이토록 단호한 대답이 내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굳이 말 안 해도 되는 (어쩌면 궁금하지도 않을) 내 최신 근황을 시시콜콜 전하며 활력을 얻는 내가 오히려 내 속 사정을 알아주는 말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다니!


생각을 한 번 더 정제할 수고를 들인다기엔 그동안 나는 상세한 개인 사정을 솔직히 오픈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는 스타일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타인 앞이라 내 사생활을 드러내길 꺼린다 여기기엔 이때껏 행한 내 행동을 말미암아 (친밀한 사이기에 더더욱)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고작 며칠 전 내가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입원했다는 걸 친구들도 알고 있었다. 내 입 퇴원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들을 만큼 가까웠고, 그 자리엔 마침 병문안을 와준 친구도 함께 있었다.


지금이라면 '나 아픈티가 나냐고. 알아줘서 고맙다고, 미안하지만 먼저 일어나 보겠다'라고 말할 것 같다. (일단 내 모범답안은 이렇지만, 실제 상황에서 정말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더불어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내 상황을 먼저 알아차려줘서 내심 감동받을 것도 같다. 타인을 향한 이토록 세심한 관심이란 참으로 귀한 것이므로.


그러나 뜻밖에도, 친절한 권유에 내가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불쾌감이었다.






























불쾌함의 이유



말 수가 줄었다는 근거를 들어하는 말은 합당했으며 (어디로 보나), 내가 달리 오해할 부분은 없었다. 실상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얼마 전 입원한 친구가 표정이 안 좋다면,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다 여겨 걱정되는 마음에 이런 말을 꺼낼 수도 있을 것이다.

관심 어린 시선과 따뜻한 배려로 도출된 친절한 제안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를 생각해 줘서 고맙다기보다) 되려 나는 불쾌함을 느꼈는데, 지금 내 상태를 파악당했다는 데서 오는 당황스러움과 내 안위를 멋대로 결정하려 한다는 데서 온 반발감 때문이었다. 말 수가 줄었다는 '관찰'과 집에 가는 게 어떻겠냐는 '판단'에는 당사자인 내가 배제되어 있었다.


나는 아픔을 숨기는데 급급해 내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는데, 친구들이 그런 나를 보고 신경 쓰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친구의 '관찰'과 '판단'은 분명 올발랐지만, 그때의 나에겐 와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느낀 불쾌함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들켰다는 데 있었다.










 




















 




들켜버렸다



(이미 다 티가 났겠지만) 난 잘 숨기고 있다 생각했다. 고통을 맨몸으로 받아내면서, 실제로는 전혀 숨길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불쾌함을 느꼈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나에게 주의를 기울여줘서 고맙지만) 당시 내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아픔에 대해 그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누구도 대신 겪을 수 없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내 아픔이었다. 나를 위한 말이라 해도, 나는 내 아픔에 대해 그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느낌은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힘들었고, 속이 울렁거리고, 어깨도 아팠다. 시야가 번쩍거리는 편두통 전조증상도 같이 느꼈던 것 같다.

내 몸에 쏟아져 내리는 감각을 티 내지 않고 받아들이기가, 그저 감내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내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을 나 외의 누군가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고,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내 필사적인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내가 느낀 당황스러움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내 의도대로 되지 않는 일과, 숨길 수 없을 만큼 많이 아프다는 사실에 약간의 수치심마저 들었던 것 같다. 둘 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잘못된 현실 인식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일박을 한 그 전날에도 결코 정상이 아닌 몸을 이끌고 외출을 감행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 중요하지도, 우선시되지도 않는 약속이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하여 끊임없이 밖으로 나돌았던 걸까? 내 건강보다 전부 후 순위로 밀려날 일이었는데.


그러나 만나도 그만 만나지 않아도 그만인 일이라 해도, 나는 약속을 취소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취소라니! 내 사전엔 없는 단어였다.







먼저 집에 가도 됐을 텐데.

약속을 취소해도 되는데.

애초에 약속을 잡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게, 처음부터 무리한 일정을 짜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이번에 못 보면 다음에 만나면 되는데, 왜 난 이번이 마지막 남은 기회인 것처럼 그리 절박하게 행동했던 걸까.


새로운 변화를 인지하는 데는 시일이 걸리며, 그 사실을 새로이 적용하는 데 또한 추가적인 시간이 걸린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런 쪽으로 꽤나 둔감해서 나에게 일어난 새로운 변화를 지하고, 받아들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받아들이고 난 후의 행동은 빠르다는 것. 인정하면 빠르게 움직이지!)

잘못된 현실 인식으로 내 몸 상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이때까지의 나는 참으면 참았지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약속을 취소한다거나 중간에 집에 가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위 같은 이유로 나는 내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도 못했다. 병원에 갔으니 어찌 됐든 곧 나을 거라 믿었다. 갑자기 확 좋아지진 못해도 아파도 참을 수 있는 정도로는 괜찮아질 거라고. 

소소하게 아프긴 했지만, 살면서 건강에 이렇다 할 큰 문제는 없었던 터라 그게 욕심이라거나 무리라 여기지 않았다. 대부분의 젊은이가 그렇듯 나 또한 건강을 잃어본 적도, 건강의 중요성을 체감할 일도 없었다. 나는 앞선 경험을 바탕으로 익숙하게 앞날을 스케치했다.




 
























나도 몰라서 그랬어



많이 아픈데, 많이 아프지 않은 것처럼 말하곤 했다. 걱정되면서도 그냥 지나가는 말인 것처럼 했다. 가볍게 말하면,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루아침에 바뀐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기보다 당시 내 현실 인식이 그랬다. 당연히 나아질 거라고 믿었고,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낙관했다. 나에게 건강은 이미 확보된 자산이었기에 변치 않을 거라 맹목적으로 믿었다.


그러나 대책 없이 긍정적이었던 건, 내심 변모한 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프다는 사실.

그리고



또 아플 거라는 사실.





그래서 내가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


나도 몰랐다.


나도 몰라서 그랬어.



안 좋으면 집에 가야 하는데, 그냥 가만히 그 안에 있고 싶었다. 일순 내 원래 생활로 돌아온 것 같아 안도했고, 이 순간을 이겨 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까지 생각했다. 지금 아프다고 집에 들어가면 난 밖에 있을 날이 없기 때문에. 위기감이 들었다. 그때 난 항상 이렇게 아팠으니까.   

외출을 포기할 수 없었다. 건강을 잃었다는 그 증명을 다름 아닌 내 두 손으로 바로 그릴 순 없었다. 내 생각과 행동과 생활양상이 바뀔 필요가 있음을 나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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