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과 이어집니다.
편두통 환자가 입을 다무는 이유는 입을 열어봤자 '아무 의미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을 한다 해서 이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해받을 수 있는가. 과연 이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편두통 환자로서 나는 절대 이해받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편두통 환자라면 누구나 무력감을 느낀다. 무력감의 종류도 다양한데,
자신이 겪는 것을 말로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때 오는 무력감.
통증을 홀로 감내해야 하는 데서 오는 무력감.
앞으로 또다시 찾아올 게 분명한 고통 앞에서 알고도 당해야 하는 무력감.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내 고통을 정확히 알리기 어렵다는 사실.
통증의 정도와 그로 인한 어려움을 이해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이해받을 수 없다. 이 불안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이해받겠는가.
처음 신경과에서 갔을 때, 의사를 만나기 전 미리 두통 증상을 토대로 설문지를 작성했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환자의 표현으로부터 가능한 객관적인 현상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처음 신경과 방문 시의 상황은 아래 글을 참조하길 바란다)
https://brunch.co.kr/@d688cc96ca81425/21
욱신거린다.
머리에 띠를 두른 것 같다.
조인다.
터질 것 같다.
찌르는 느낌이 든다.
두근두근하는 박동성이 느껴진다 등
그러나 아무리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애써도 편두통 환자가 항시 느끼는 감각을 말로 전달할 때엔 필연적으로 정보의 누락이 발생한다. 여러 단어로 두통 양상을 표현하려 시도하지만, 세상엔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통증을 수치화할 수 없기 때문에 겪게 되는 편두통 환자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앞선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https://brunch.co.kr/@d688cc96ca81425/1
내가 겪은 두통 증상을 설명하고자 할 때, 나는 차라리 '감각의 전이'라는 불가능한 상황을 그릴만큼 표현의 한계를 실감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말로 백 번 하느니 한번 겪어봐야 좀 알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소상히 설명하여 원하는 의도를 전달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가능한 내 생각과 감정을 왜곡 없이 분명하고 상세하게 전하고자 했다.
특정 상황에서 내가 느낌 감정을 미묘한 뉘앙스까지 살려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이를 표현키를 주저치 않았으니, 그 결과로 나는 '네가 느낀 (설명하기 난감한) 애매모호한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표현하는지 놀랍다'라는 식의 감탄을 종종 듣곤 했다.
내가 느낀 감정을 다각도로 분석하여 내가 의도한 바 그대로 전달됐을 때, 그래서 (자신도 그게 뭔지 안다며) 상대방이 그 느낌이 뭔지 정확히 알아차렸을 때 나는 '통했다'라는 생각과 함께 짜릿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이 남다른 욕망과 쾌감의 기저에는 언제나 내 마음을 '이해받고 싶다'라는 원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이 남다른 나에게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라는 인식은 통증을 견디는 것과는 또 다른 괴로움이었다. 이 어려움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을 붙이든 붙이는 대로 다른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외로움이라면 외로움일 테고, 슬픔, 고독, 소외감, 그 무엇도 될 수 있었다.
아, 내가 느낀 감각들을 그대로 저장할 수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가 한 번쯤 느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 느끼기에 절대 좋지 않은 감각이라 해도 나는 누군가 제발 느껴보길 소망했다.
이 세상 사람 중 단 한 명이라도 나와 같은 통증을 공유해 보기를. 아픔만이 아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견디기 힘든 이 감각을 느껴봐 주기를. 누구도 느끼지 않았으면 싶은 끔찍한 통증이지만, 누구라도 알아봐 줬으면 싶었다.
고통 앞에서 나는 혼자였다.
인간은 불통. 내가 아무리 통하고자 애써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로우(raw) 데이터는 훼손되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결코 같은 것을 느낄 수 없다. 절대 그 누구도 내 고통을 알 수 없겠지.
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좌절했다.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하고, 얼마나 힘들어하는지와 상관없이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외로웠다. (난 이렇게 힘든데) 이해받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화가 나고 억울했던 것도 같다. 육체가 느끼는 통증 외에도 감정적으로 힘이 들었다.
그러나 또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편으론 딱히 이해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토록 이해받고자 애썼지만, 이해받고 싶지 않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은 통할 수 없는데,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가? 누군가를 진실로 이해하는 게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라면 (어차피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데) 적당히 '이런 경향이 있다' 정도로만 알면 되는 일이었다.
의사가 환자를 보는 시간은 한정돼 있다. 내가 아무리 내 통증과 증상을 자세히 설명하려 해도, 마주하는 몇 분의 짧은 시간만으로 (의사와의 면담은 보통은 3분 컷, 길어야 10분이다) 하루 내내, 며칠 내내, 몇 개월 내내 고통으로 점철된 나날들을 의사가 정말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솔직한 마음으로, 의사가 굳이 나를 이해하는 데 시간을 쓸 거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비단 의사만이 아니라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그리 관심이 없다는 경험적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내 고통을 이해하는 게 필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고통의 이해'는 편두통 환자의 소외감과 외로움을 도닥이는데 놓칠 수 없는 부분일지언정, 편두통 치료의 선행과제는 아니지 않나. 가족이 병원을 찾게 하는 것 이상의 의학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처럼, 나에겐 아주 중요한 '편두통 환자의 고통을 얼마나 이해하느냐'라는 화두는 정작 치료자의 입장에서는 그리 중요하게 다룰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하기에 편두통 환자가 겪는 정신적 문제는 외면받기 쉬운 환경에 놓이게 된다. (편두통 환자는 우울증과 불안증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편두통 환자에게서 우울증 발병 비율이 높은 것에 이 같은 환경의 영향이 없진 않을 것이다.
어렵사리 내 두통 양상을 가능한 현실에 가깝게 전달하는 것에 성공하더라도, 이것이 치료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설사 정말 어떤 미래에 '감각의 전이'가 실현화되어 환자의 증상을 (만약 원한다면) 똑같이 느껴볼 수 있게 된다 해도 단지 이만으로 치료가 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의 입장에서 내가 아무리 힘들어해도, (이해받지 못해도, 그래서 감정적인 도움을 얻을 수 없다 해도) 모든 게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이는 신경과 의사의 역할은 아닌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이들이 최선을 다할 것을 믿는다. 환자를 낫게 하고자 하는 의사의 소임에 충실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그렇다면 의사의 기본적인 의무는 다한 게 아닌가.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 그것은 많은 환자들이 기대하는 바겠지만, 의사의 입장에서 일 순위로 고려할 부분은 아닌 것이다.
환자가 증상을 가장 많이 공유하는 대상이며, 고로 가장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할 의사마저 나에게 정도 이상의 관심이 없다. 의사는 병을 고치기 위해 환자의 증상을 알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환자의 고통을 자세히 이해할 필요는 없다.
진료에 차질 없을 정도만 판단하면 되는데, 나는 그 이상을 바랐다. 성에 차지 않았다.
나를 낫게 해 줄 의사마저 그런 것에 내심 섭섭하면서도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건 '의사는 그럴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이해'가 치료적 관점에서가 아닌 (편두통은 '치료'보다 '관리'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지만) 인간적인 교류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더는 의사에게 청할 일이 아니게 된다.
필요한 만큼만 알면 되니까. 우리는 그런 공적인 관계니까. 내가 요구하는 정도가 더는 질환을 낫게 하는 문제가 아닌 사람 사이의 일이 되었음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의사에게 이해를 구하길 포기했다.
그러나 필요와 바람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서, 그 괴리가 나를 슬프게 했다.
이해가 필요치 않다 해도
나는 이해를 바랐다.
나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나눠지고 싶었다. 이해받고 싶었다. 도와주길 바랐다.
혼자 참고 넘긴다면, 이 갑갑한 상황에서 곧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계속 아파야 할 줄 몰랐다. 낫는데 급급했던 나는 내 마음을 등한시 여겼다. 낫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요를 우선시하여, 바람을 무시하고 지나치길 반복했다.
바람은 어느새 세찬 태풍이 되어 나를 뒤흔들었다.
그해 나는 내 의지로 다시 정신과를 찾았고,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소통에는 시간이 걸리고, 쌍방의 노력이 필요하다. (의사인지 가족인지) 상대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에 따라 노력의 방향과 정도가 달라지겠지만, 환자를 대하는 데 있어서 각자 위치에서 나름의 노력을 들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의사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라는 이해를 보일 이유가 없다고. 나와 정서적으로 어울릴 의무가 없다고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럼 의사가 아닌 사람은? 내가 만나는 상대가 오직 의사만이 아닐진대, 내 힘듦을 알아달라는 게 그리 무리한 일인가? 내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조차 바랄 수 없단 말인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혼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