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 편두통으로의 진전
만성 편두통으로의 진전
그 해 4월, 한번 시작된 두통은 날이 바뀌어도 잦아들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 입원을 하기 몇 달 전부터 징조는 있었는데 말이다.
약 복용 횟수가 점점 늘어갔다
원래는 진통제를 먹으면 괜찮아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진통제의 효과가 이전만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약을 먹으면 조금은 나아졌고, 통증을 잊지는 못해도 견딜만했던 터라 위험을 체감하지 못했다.
변화는 점진적이었다. 무엇보다 두통은 나에게 이미 일상이었기 때문에 (못 견딜 정도가 아니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 못했다. 좀 괜찮은 날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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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통 일지를 쓰며, 두통으로 입원하고 편두통 진단받은 당해 연도 사진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해 상반기 내가 누구와 어딜 갔는지, 만나서 뭘 했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등 잊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서서히 사진첩 속 이미지를 실마리 삼아 퍼즐을 맞춰갔다.
그러나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앞에 두고도 그날의 음식이 어땠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대략적인 인상만 잔상처럼 남아 있다.
몇 년이나 지난 일이고,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닐 테다. 사진으로 누구와 어딜 갔는지는 확인할 수 있어도, 이런 디테일은 오롯이 내 머릿속에 저장될 뿐이니 기억나지 않을 수 있겠지.
정말 그럴 수도 있다. 더군다나 나는 옛일을 기억해두고 다시 꺼내 보는데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아서, (그런고로) 일상 속 에피소드 또한 곧잘 잊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그때 사진을 보고 있자면,
머리가 꽤나 아팠던 것.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
통증을 티 내지 않느라 힘들어했던 것.
(왜 이런 기억은 구체적으로 남는지) 언제 약을 먹을지 시기를 재는 한편, 또 어떤 날은 진통제를 챙겨 오지 못해 무척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날도 그날도, 이 친구를 만났을 때도 저 친구를 만났을 때도 사진 속의 모든 순간 나는 두통으로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나는 몸이 보내는 경고성 신호를 눈치채지 못했는데,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가벼운 증상이라 여겨 심히 방심했던 탓이다. 그렇게 나는 휴식을 취하라는 몸의 지속적인 요구를 여상히 넘기고 말았다.
만성 두통 환자가 되기 전 나는 두통이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감기 때문이라면 모를까, 두통만 외따로 겪은 적은 정말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흔치 않은 이벤트였다. 그래, 머리가 아픈 건 당연한 일이 아닌데 말이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건만, 어느새 나는 이만 치도 자연스레 머리의 통증을 내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두통은 나도 모르는 사이 진전되고 천천히 스며들어 내 일상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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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한구석엔 숨길 수 없는 불안이 도사렸다. 그리고 그 불안함을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민을 토로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했다.
요즘 진통제를 먹으면 효과가 없는 것 같아.
좀 걱정이야.
라고 말하곤 했다. 다시 돌이켜 봐도 내가 걱정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내 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두통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한 것 또한 아니었다.
그해 나는 직장을 옮겼다. 한창 글을 쓰는데 열심이었던 때라, 솔직한 말로 일보다 글에 더 관심이 쏠려있었다. 글쓰기에 온 마음을 쏟고 있던 나는 글을 쓰기 좀 더 용이한 환경의 직장으로 이직을 결정했다.
일과 글, 둘을 병행하는 것만으로 참 바빴다. 그러나 이만으로 그치기에 나는 하고 싶은 일도, (그리하여) 해야 하는 일도 많았다.
(지금이라면 체력을 회복하는데 집중했을 것 같지만) 매주 주말 나는 친구와 새로운 곳을 찾았다. 딱히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다거나,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성사된 만남은 아니었다. 약간은 관성적이지 않았나 싶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하루를 보람차게 보내고 싶다는 강박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주말마다 바빴으니 평일엔 여유 있지 않았나 싶은데, 당황스럽게도 또 그렇지도 않았다. 사회인이 된 지 몇 년 안 됐던 나는 일과 직업에 대한 회의감에 젖어 있었다. 직장을 옮기며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했지만, 어딜 가나 나를 소모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 했지만, 돈만 벌고 싶진 않은 마음이랄까. 이게 일로 충족될 수 없는 마음이라면, 나를 위한 다른 어떤 활동을 통해서 이 결핍을 채우고 싶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매주 목요일이었을 것이다) 평일 저녁, 교양 강의를 들으러 광화문에 갔다. 현직 대학교수의 인기 강의를 일반인에게 개방한 프로그램이었는데, 매주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낯설고 흥미로운 주제에 머리가 깨는 느낌이랄까. 학생 때 생각도 나고 좋았다. 평일 저녁에 지치지도 않는지 강의실엔 수업을 듣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들 어떤 연유로 이곳을 찾았나 궁금하면서도 참 대단들 하다는 생각을 했다.
교양 강의를 듣지 않는 날 중 일주일에 두 번은 일본어 수업을 들었다. 그즈음 한 일본 만화책을 감명 깊게 읽고는 일본어를 다시 배우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일본어 원서를 줄줄 읽겠다는 포부까지는 아니었지만, 작품을 향해 끓어오르는 애정을 다른 건설적인 방향으로 승화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일본어는 반가웠다. 고등학생 때 이후 멀리했던 일본어를 나는 꽤나 성실히 배우러 다녔다.
강의 중후반부쯤이었을 것이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딱딱한 학원 의자에 앉아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프면 그냥 편히 쉬면 좋을 텐데, 그땐 나를 보살피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외부의 일이 중요했다. 나는 좀 더 나아지고자 하는 욕망에 더없이 충실했다.
계획만 봐도 충분히 버거워 보이는 일정인데, 이 모든 걸 한 번에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하면 좋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는데. 우선순위를 따져가며 내게 가장 중요하고 또 필요한 일부터 하나씩 차례대로 실행에 옮겼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헤르미온느처럼 시간을 돌리는 모래시계라도 있다면 모를까, 현실적으로 내가 하고자 한 모든 일을 다 할 순 없었다. 아니, 하기야 어찌어찌한다 해도 집중하고 몰입하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하기사 하나만 제대로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일로 소모된 나를 채우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 결과 정신은 만족했지만, 체력적으론 부담이 됐다. 쉬어가는 시간이 없었으니까. 이동시간조차 고려치 않았으니, 그때 나는 씻는 시간조차 아깝게 여겼다.
밥 먹는 시간도, 씻는 것도, 자는 시간마저 아쉬워하며 가용 시간을 계산하는 나를 보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왜 이렇게까지 시간에 쫓기는 건가 싶어서. 아무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지만 먹고, 자고, 생활하는 시간을 쪼개가면서까지 이렇게 조바심을 느끼면서 할 이유가 있나 싶어서.
언니는 그때 나를 보며,
얘가 왜 자꾸 일을 벌이지?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한테 뭐라 한마디 했을 법도 한데, 언니의 말을 듣고도 내가 흘려 넘겼는지, 난 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훤히 보이는 일이 당시엔 갈피조차 잡을 수 없다. (내 눈앞의 일이 되면 그런 것 같은데) 욕망이 눈을 가리면 더더욱 그렇다.
열의에 가득 찬 나는 잠은 죽어서도 잘 수 있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면 가능할 거라 여겼다.
욕심껏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면서도 과욕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내가 원하니, 막연히 가능한 일이라고 (가능해야 한다고) 여겼다. 안 될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불가능은 고려치 않았다. 하고자 하는 욕구, 실행에 옮길 의지가 충만한 나는 창창한 앞길을 꾸려갈 생각으로 가득 찬 희망찬 20대였다. 내 인생에 두통 따위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