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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약 Sep 15. 2022

정신과 3 - 첫 정신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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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에 다녀와서 : 첫인상



들어서자마자 편안했다. 웃는 얼굴, 환한 미소가 사람을 이렇게 편안하게 하는구나. 두통에 힘겨워하면서도 내가 처음 느낀 감상은 이 방의 주인이 나를 반기고 있다는 거였다.







친절하다. 

밝다.

따뜻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게 가식적이지 않(게 다가온) 다는 놀라움. (물론 여러 번 보면 상쇄된다만, 첫인상에 한정하자면 그랬다) 


나를 보고 활짝 웃는 얼굴에 처음엔 당황했고, 의아하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렇게 반갑게 환자를 맞이하는 의사는 난생처음이었다. 비단 의사만이 아니라 나를 아는 어떤 사람에게서라도 이런 식의 환대를 받았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도 이렇게 반갑게 맞아줄 수 있는데, 내가 너무 무미건조하게 산 걸까? 불쑥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후 재차 정신과를 방문할 때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환히 웃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반복된 경험으로 이 의도적인 표현이 환자의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한 직업적 노력이거나, 정신과 의사로서 의식적으로 체화한 후천적 특성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혹 타인에게 열린 (허들이 낮은) 한 개인의 고유한 특질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딱히 정신과가 어둡고 차갑고 불편한 공간일 거라 생각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밝고 편안한 공간일 거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막연히 나와 상관없는 내가 찾을 일이 없는 장소라 여겼던 것 같다. 그랬기에 예기치 않은 방문, 긴장이 풀리는 편안한 공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의사까지 그곳의 모든 것이 의외로웠다.













내가 원하는 것



감정 표현에 인색한 평범한 한국의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나고 자라 나 또한 감정 표현이랄 게 딱히 없는 어른이 됐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서툴러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나지만, 오히려 그러하기에 더 '진짜'를 구분하는데 용이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 인색한 표현 속에서 재주껏 진짜를 찾아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가뭄에 콩 나듯 주어지는 미세한 표현 아래 숨어있는 관심과 애정을. 부모님의 (지나치다 싶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향한 사랑은 결코 알기 쉬운 모습으로 주어지지 않기에 나는 순순히 드러나지 않는 것을 스스로 찾아내야만 했다. 

나를 향한 감정을 알아채는데 익숙했으니 주위의 흙을 털어내고, 내가 원하는 바를 발굴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드러나지 않을 뿐 숨길 수 없는 마음이었으니까. 다만, 이따금 주어지는 무심한 친애의 정을 소중히 여겨 소실 없이 흡수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입 밖으로 구체화되어 나오는 직접적인 언어를 바랐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내 눈에 보이고 내 귀에 들리지 않으면 실로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감정 표현에 익숙지 않은 피붙이처럼 나 또한 오롯이 주어지는 애정을 받는 것에 익숙지 않았음에도, 때때로 (말이 아니라면) 밖으로 명백히 드러나는 그 어떤 비언어적인 표현이라도 바랐다.








따뜻한 눈빛, 
애정 어린 표정, 
웃는 얼굴, 
가벼운 포옹, 


그리고 너를 사랑한다는 말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눈에 보이는 애정을 원하고 있었다.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둔감한 사람이라 해도 친밀감과 공감, 그리고 지지를 필요로 한다. 욕심 많은 나는 오해할 여지없이 직접적인 말과 행동으로써 이를 드러내 주길 원했다. 무뚝뚝한 부모님에겐 (그리고 나마저도) 다정한 손길 한 번이 낯설고도 곤혹스러운 일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가끔씩 주어지는 몇 방울의 수분으로 내 갈증을 해소하긴 부족했으니, 짧은 시간 잠시 목을 축일뿐이었다. 마른 수건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몇 방울의 물기를 순식간에 빨아들이듯, 내 안의 메마른 토양은 흠뻑 젖어들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 있는 친절이라도



티브이에서 오은영 선생님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을까?) 다른 사람도 나처럼 선생님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고, 그리 느낄까.

내가 우연히 정신과를 찾고, 의사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와 동일한 느낌을 받았다. 눈앞의 사람이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했다. 환한 웃음과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따스한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 무엇을 안다고?) 기뻤다. 마음이 편해졌고, 나를 향해 열린 마음이 고마웠다.  


이유 있는 친절도 친절이니만큼, 이를 곡해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친절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뭐가 됐든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동일한 친절이라 해도) 친절을 표하는 마음 씀엔 타인을 향한 배려가 녹아 있었다. 

무엇보다 친절하게 대해주면 기분이 좋아졌다. 나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친절이 아니라 해도 충분히 포근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을 감안하고서라도, 그때 나를 향한 웃음과 그 안에 있는 관심은 진짜였다. 나를 맞이하는 따뜻한 그 얼굴은 정녕 가식이 아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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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해와 바람'을 보면, 해와 바람은 나그네의 옷을 누가 먼저 벗기냐로 서로 내기를 건다. 동화의 결말에 가면 따뜻한 햇살에 나그네가 스스로 겉옷을 벗는 결과로 태양이 바람을 이기게 된다. 


이처럼 사람 마음이 단번에 무장해제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마음속 여러 문 중 하나쯤은 나를 향한 따뜻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스르륵 빗장을 열어버릴 것 같았다. 

그런 강력함이 존재했다. 우리가 초면이어도,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내기'라는 개인의 흥미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닌, 눈앞의 환자에게 보이는 온전한 진심 어린 관심이었으니 사람 내면의 빗장을 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목표 달성



의사선생님은 나에게 어떤 연유로 병원에 왔냐고 물었다. 나는 나라믹정이 필요해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나라믹정이 어떤 약인지 모르고 있었고, 신경과 의사라면 모를 수가 없는 약에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이후 짧은 대화를 통해 내가 신경과에 가려했으나, 정신과를 잘못 찾았음을 알게 됐다. 


선생님은 내가 그동안 봐온 의사선생님 답지 않게도 나라믹정은 자신이 모르는 약이라며 어떤 약인지 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환자 앞에서 '모른다'라고 말하는 의사라니!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전문가를 (의사 외의 다른 직종에서라도) 나는 이때껏 봐본 적이 없다! 몰라도 아는 척하려 애쓰는데 (그게 보통일 텐데) 모른다고 대놓고 말하는 의사는 낯설고, 환자에게 질문하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래, 의사라고 다 알 순 없을 텐데 말이다.


나는 나라믹정이 편두통으로 처방받은 약이며, 현재도 복용 중이라 말했다. 또한 두통이 심해 신경과 다음 내원일까지 약이 부족할 거 같아 미리 더 챙겨두기 위해 왔음을 밝혔다. 

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나라믹에 대해 조금 찾아보는 것 같더니, 나에게 몇 개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넉넉하게 30개를 달라고 말했다. 


환자가 약에 대해 뭘 아냐며 (처방은 의사의 영역이자 권한이라며) 원하는 약을 처방 안 해주는 의사도 있는데, 다행히 나는 손쉽게 나라믹 처방전을 얻어냈다. 그리곤 바로 자리에 일어날 생각이었다. 어느 병원에서와 같이 말이다. 약을 받겠다는 최초의 목적을 이뤘기에 이곳에 더 남아있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너의 문제가 뭐니



내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물었다. 본인이 도움 될 일이 있는지, 지금 뭐가 힘든지 말이다. 자신이 들어줄 수 있다고 했다. 

상냥했다. 그 시선, 목소리, 눈빛, 말투 모든 게. 자신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온갖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에 내 마음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이 모든 직접적인 관심에 나는 맥을 추리지 못했다.


누군가 하나를 물어보면 곧이곧대로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는 모범생 근성이 뼛속까지 새겨져 있던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질문을 질문 그대로 받아들이곤,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나는 지금 힘들다. 

너무 아프고,
너무 힘든데, 
뭐가 제일 힘들지? 뭐가 문제지? 

내 문제가 뭐지?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내 문제가 뭐겠어! 당면한 문제는 하나였다. 

바로 통증. 그 하나가 너무 커서 그 외에 (분명) 있었을지 모를 다른 문제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의 상황이 급박하여 나머지는 전부 뒤로 밀쳐졌다. 


나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힘들다고 했다. 


의사선생님은 몇 차례 방향을 바꿔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무언가 나에게서 어떤 실마리를 얻으려 했던 것 같다. '네가 많이 아픈 건 알겠다. 그런데 혹시 두통 외의 다른 문제는 없니?' 하고자 하는 말은 아마 이것이었을 테다.

그러나 나는 아픈 것 외엔 아무 문제없다고, 당장 아프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제발 아프지만 말았으면 좋겠다고. 













상담할 상태가 아냐



상담을 진행하기에 나는 너무 많이 아팠다. 통증 외의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말하는 와중에도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집에 있을 때보다 더. 만약 출발할 때 이 정도로 아팠다면, 오늘 외출은 포기했을 것이다. 


나는 몇 번을 반복해서 아프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그리고 의도치 않게 또 눈물이 났다. 이맘때의 나에게 눈물은 꽤나 익숙했지만, 가족이 아닌 사람 앞에서 (더군다나 초면인 사람 앞에서) 우는 건 또 처음이었다. 

그러나 당황은 잠시 뿐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곧 아무 생각 없어졌는데, 내 사정이 어려워 남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막을 생각도 없었지만) 터진 눈물을 막을 방법이 없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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