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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약 Oct 20. 2022

편두통을 숨기는 이유 5 - 주홍글씨 ①


내가 먹을 약






한 번은 직장에서 내가 먹을 약을 직접 조제한 적이 있다. 병원 예약일 보다 늦게 갈 사정이 생겨 매일 먹는 (편두통 예방) 약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서둘러 집 근처 병원에 들러 처방전을 받고, 내가 일하는 약국에서 직접 조제를 했다.


당시 일하던 약국에서는 내과약과 감기약 정도만 취급했기 때문에 (내가 먹는 약은 구비하고 있지 않아) 새로 주문을 해야 했다. 약을 주문하고, 받고, 검수하고 챙긴 후 약국장님에게 손수 약을 조제했음을 알렸다.


약사가 자신이 일하는 약국에서 본인 약을 조제하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약국장님이 지나가듯 내게 무슨 약을 먹는지 물었을 때 나는 잠깐 망설이고 말았다.

뭐라 설명할지 잠시 고민했다. 둘러대려면 얼마든지 둘러댈 수 있었으니까.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같이 무난한 말로 넘길 수도 있었고, 직접적인 대답을 피해 '먹는 약이 있어요' 정도로 얼버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처방전을 보면 어떤 계열의 약인지 알 텐데, 애써 그럴듯한 말을 꾸며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저 두통 있어요






그때쯤 나는 편두통으로 진단받은 지 시간이 꽤 지난 후라, 내가 두통 환자임을 깨끗이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었다. 내가 한 달에 15일 이상 두통을 겪는 '만성 두통 환자'라는 것까지 알리고픈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두통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물어보지도 않은 내 개인적인 사정을 일부러 퍼뜨릴 생각은 없다. 내 주변 사람 모두가 내가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자주 아픈 지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오픈할 생각도 없지만 이미 재하는 내 현실을 마냥 가리는 것 또한 추가적인 수고스러움을 감내해야 했다. 주머니 속 송곳처럼 이질적인 무엇어느 순간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심각성은 표하지 않더라도 두통이라는 주제가 언급될 때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소극적인 방식으로라도 알리고 싶었다. 이미 두통은 내 일부가 되어서, 막연히 계속 숨기기만 한다면 나는 몹시 답답할 터였다.


'아픈 나'를 받아들였으니 사서 거짓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아픈 게 내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또 한가한 약국에서 홀로 4시간 자리를 지키는 것쯤이야 아무 문제가 없었던 터라 내가 두통이 있고, 매일 두통약을 먹은들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책잡힐 일 없이 나는 내 일을 무탈히 잘하고 있었다.




























왜 놀라고 그래






약국장님의 질문에 나는 매일 먹는 편두통약이라고 대답다. 내 을 들은 약국장님는 눈을 땡그랗게 치켜뜨더니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커다란 눈동자가 표하던 얕은 떨림과 미처 숨기지 못한 떨떠름함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사실 상대가 놀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내 입장에서는 정말 많이 좋아지고, 좋아지고, 또 좋아졌던 터라 살짝 마음이 안일해졌던 것 같다.











뭐, 사람이 약 먹을 수도 있잖아?












그래. 약 먹을 수도 있지. 더군다나 먹는 약도 몇 개 없어서 괜찮겠거니 싶었다. 두통이 조절 안돼서 내가 봐도 걱정될 정도로 약을 많이 먹은 적도 있는데, (그땐 솔직히 암담했다) 개수가 줄어 딱 두 알만 먹으니 나는 이 정도면 됐다고 내심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괜찮겠지 싶었는데, 상대는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만 보고도 놀라더라. 뒤늦게 아차 싶었다.


























매일 약을 먹는다






편두통 때문이라지만, 내가 당시 복용 중인 약은 계열 상 우울증신경통증에 쓰는 약이었다. 이 약들이 주는 선입견을 알기에 나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다름없는 침착한 태도로 대응했다. 그러나 '매일 약을 먹는다'라는 말이 주는 파급력만 새삼 실감했을 뿐이었다.


부정적인 인상을 감수했으나, 도리어 이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는 나에 대한 의구심으로 돌아왔다. 두통이 도대체 얼마나 심하길래 매일 약을 먹나 하는 눈초리가 따라온 것은 덤이었다.









약국에서 편두통 예방약을 먹는 환자를 만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선 편두통 예방약의 존재를 모르는 환자가 많고, 알아도 매일 약을 먹는 것을 꺼리기도 한다.


일부 신경과 근처 약국이라면 모를까, 대다수 약국에서 매일 약을 먹으며 두통을 관리하는 환자를 보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내가 약사라서 (병원 문턱이 낮아) 더 신속히 신경과를 찾고, 예방약의 필요성을 알기에 거리낌 없이 두통약을 복용한다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국장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나는 두통을 질병이라 인식하지 못했고, 하루 종일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나서야 뒤늦게 병원을 찾았으니 말이다.




https://brunch.co.kr/@d688cc96ca81425/14





또한, 다른 두통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매일 약을 먹는 것에 반감이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뿐, 나도 가능하다면 약을 먹지 않는 방안을 택했을 것이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을 뿐, 약에 대한 거부감을 깨부술 만큼 심하게 아프지 않았더라면, 서슴없이 매일 약을 먹는다는 선택을 과연 했을까 싶다.


그러니까 약국장님의 편견엔 틀린 구석이 없었다. 편견이랄 것도 없이 당신의 생각은 맞았다. 거부감을 무릅쓰고 매일 약을 먹는다면, 그럴 필요성이 있어서이다.


몇 번의 예방약 변경을 거쳐 센시발을 더는 복용하고 있진 않지만, 항우울제에 대한 반감은 처음 예방약을 먹었던 시점인 아래 글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https://brunch.co.kr/@d688cc96ca81425/18
































차별을 느낀 건 아니지만






그래. 약을 먹는 게 당연한 게 아니지.

그래, 안다.


그러나 나로서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서, 약의 존재를 떼놓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약이 없으면 안 되니까. 비록 말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겉으로 보기에 많이 좋아졌다 해도, 통증을 나 혼자 참아낼 수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약 먹을 필요가 없는 아프지 않은 건강한 사람과 나는, 다르다.


다르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지점이 참으로 상이해서 약국장님을 놀라게 하고 말았다. 그리고 상대만 놀란 게 아니라 '두통으로 매일 약을 먹는 나'를 향한 외부의 시선을 다시금 인지한 나도 놀랐다.









편두통 예방약을 먹는다










이 자체로 불시에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이를 걱정하는 눈빛으로만 해석한다면 너무 순진한 거겠지. 일하는데 차질이 없을까 하는 눈빛이 단지 내 착각은 아닐 것이다.


네가 아프다니까 아프겠지만, 그래 아픈 건 알겠다만, 일에 지장을 주면 안 돼 하는 그런 얼굴이 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을 마주한다면 차라리 아픔을 숨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진짜 약점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불편하게 만든다. 어떤 의미로든 서로 얽혀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몇 년 만에 반가운 지인과 연락이 닿은 적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만큼 쌓인 근황 이야기만으로 시간이 술술 지나갔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상대가 물었다.











왜 파트로 일해?










짧은 시간 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나에겐 이 질문에 대응할 여러 답안이 있었지만 여타 이유를 제하고 본질에 접근한다면 결국 내가 아프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파서 파트로 일한다. 두통은 나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일을 포함한 전반적인 내 선택의 근간에는 분명 두통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결정을 할 때 두통 외의 다른 요소 또한 헤아리지 않을 수 없으니, 단지 두통만으로 내 선택을 전부 설명할 순 없었다. 무슨 일이든지 간에 나의 모든 이유가 오로지 두통 하나가 될 순 없다.


그러나 내가 아픔으로써, 내 모든 행동과 나를 설명하는 이유가 하나에 수렴하는 것 같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말이다.













네가 아프니까.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너와 나는 다르고, 나는 아니라는 인식'  하에 순식간에 나는 상대의 반경 너머로 떠밀린다. 삽시간에 밀쳐져 저 멀리 떨어지고, 그 고정된 전제하에 나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아픈 사람이 된다.


내가 안 아프진 않지.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아픈 사람이 아닌 아프기만 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낀다.














나는 아플 때도 있지만, 아프지 않을 때도 있다.





아파서 못하는 일도 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지)





아파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두통이 내 많은 일상을 지배하고,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지만

나는 오직 두통만을 고려해서 행동하진 않는다.










 




그러나 두통 이전에 '나'라는 사람이 있음을 상대는 모르는 것 같다. 잊어버린 것 같다.

당사자인 나로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아픈 나'를 상대는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고 스쳐 지나간다.


자기 일이 아니라서 그렇겠지. 그 정도의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걸 테다.

그러나 아픈 구체적인 상황은 알아주지도 않으면서, 이해는 없으면서 배제는 빠르기도 참 빠르다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아파서 상황이 안 돼 거절해야 한다면, 해도 내가 할 텐데 제의조차 없이 제멋대로 본인 선에서 첫 타에 걸러진다.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나는 일선에서 배제된다.


그러나 왜 알아서 좋을 대로 판단하는가?


























열등함






보다 더 직관적이고 노골적인 이유로 편두통 환자가 자신의 아픔을 말하기 꺼리는 데에 나는 이가 우월함의 반대에 위치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불리하기 때문에. 자연환경에서 병이 있는 개체가 저절로 낙오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냥 한 번 생각해 봐도 아픈 사람과 누가 같이 일하고 싶겠는가? 나도 안다. 괜히 일에 지장을 줄고 같고, 찝찝하잖아.


특출한 뭔가가 없는 한 (아니, 설사 있다 하더라도) 한 개인의 병력은 대체재와 대체 인력이 풍부한 이 시대에 그 사람을 거부할 백전불패의 사유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돌연 열등해진다.


당장 아픈 것도 힘이 들지만 아픔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면, 아프다는 사실 자체는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일을 해내는데 아무 문제없다고 해도, 그럴 역량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선택받지 못하리라는 제법 현실적인 두려움이 성큼 내려앉는다.


나는 두통 진단 후에도 여러 번 약국 면접을 봤는데, 두통이 있음을 알린 적은 한 번도 없다. 나서서 말할 이유도 없지만, 알려서 이득 될 게 없는 나에게 불리한 사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면접 때면 누구나 경쟁력 있는 본인의 좋은 모습을 어필하려고 하겠지만, 나의 경우, 있는 에너지를 힘껏 짜내 가능한 밝고, 힘 있고, 건강한 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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