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살며, (단순히 현실적인 것을 넘어) 손해를 보지 않는 행위에 몰두할 때가 있다. 내가 먼저 살고 봐야 주변에 시선이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이치 앞에서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본인의 이익을 좇아 움직인다.
그러나 그 어느 때라도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선의가 존재한다.
편두통 관련 글을 볼 때마다 캡처해서 보내주는 친구가 있고, 새롭게 알게 된 정보에 혹여나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블로그 댓글로 전해주는 생면부지의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내가 아파도, 일을 못해도, 신경질을 부려도 괘념치 않고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가족이 있다.
좋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 뭐하나 싶지만, 슬픔은 나누면 반까지 되진 못해도 확실히 가벼워지긴 하는 것 같다. (우선 말을 꺼낼 여력이 되어야겠지만)
인간이 가진 동물적인 생존본능과 같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라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우리의 유전자 어딘가에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우리 집 앞으로 오면 나는 편하고 좋다. 그동안 주는 보람을 느끼며 살았는데, 그에 못지않게 받는 것 또한 기분이 째지더라.
다음번에도 이랬으면 좋겠다 슬그머니 꾀가 나고, 상대의 마음 씀을 모르는 척 은근슬쩍 넘기려 들기도 한다. 이렇게 모르는 척 넘어가면, 다음번에도 나에게 이롭게 돌아가리라 천연덕스레 기대하면서.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지만 웃기게도 선의 앞에서 되려 이기적인 마음이 든다.
때때로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배려를 당연히 여기지 말자 다짐한다.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는 배은망덕한 태세를 타산지석 삼아 타인의 호의를 원래 내 것인 마냥 굴지 않겠다.
주는 입장도 아니면서 괘씸하게 맡겨 놓은 물건을 되찾는 것 마냥 상대의 배려를 호기롭게 넘기지 않을 것이다. 고마운 일은 고맙게, 미안한 일은 미안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픈 나에게 질려 멀어질 것을 두려워했지만, 어쩌면 고마워하는 걸로 충분했을지도 모르겠다. 감사를 표하는 마음 자체가 작은 보답이 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마음은 숨겨지지 않는다지만) 표현에 인색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마음을 표하는데 주저치 않기로 한다.
고마우면 고맙다고,
미안하면 미안하다 말하자.
입장을 바꿔 상대가 내 선의를 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겨 당연시하지 않는다면, 또 못된 마음으로 이용하려 들지 않는다면 나는 교분을 끊지 않고 잘 이어나갈 테다. 상대의 편의를 위하느라 다소 불이익을 받게 되더라도 말이다.
마음 한켠에 고마움을 품은 채, 언젠가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도움을 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내가 좀 아파서 그렇지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개똥도 쓸데가 있고,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일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일찍 아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기회도, 시간도 넉넉하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어떤 이득을 주지 못하더라도, 한 개인에게 무언가는 할 수 있으리라 낙관한다.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피해받는 것도 피해 주는 것도 싫지만, 좀처럼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민폐 끼치지 않으려 하지만, 그럴수록 관계만 정도 이상으로 조심스러워질 뿐이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고, 피해를 받는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우리는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일거수일투족 셈하지 않는다면) 피해는 일시적이다. 내가 받는 불이익은 단일한 종결된 한 사건이 아닌, 연속적인 사건의 일부가 된다.
선의는 돌고 돈다. 세상은 상부상조, 우리는 타인을 돕고 또 도움받는다. 한 시점에 발생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조금 더 넓은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작은 손해 앞에서 한결 편안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주는 것도 좋지만 받는 것도 좋다.
받는 것도 좋지만, 주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그러나 상부상조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상부상조의 이점을 누리지 못하고, 나만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입장이라면 어떨까. 나만 항상 피해를 받는 입장에 처할 때, 그때도 우리는 너그러움을 발휘할 수 있을까?
우리는 본의 아니게 서로 부대끼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상대가 늘 같은 대상일 순 없다.
내가 건넨 선의가 지속적인 부담이 되어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싶을 때, 나에게 오히려 해악이 되어 돌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 나만 계속 피해받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상황을 피하려 들지 않을까? 도움이 필요한 상대의 부족함 때문에 괜히 멀쩡한 사람의 부담만 가중된다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모이면 (언제 어느 곳이든) 조금 뒤떨어지고 모자란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일견 비생산적이고, 피해만 끼치는 무용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당장 쓰러져 방에 누워만 있는다 해도 엄마가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도움을 일방적으로 필요로 한다 해서 쓸모없고 무가치하며,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파킨슨병을 앓는 한 정신과 의사가 오랜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이모저모 챙김을 받는 것과 같이 아프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할지라도 그 존재만으로 충분한 경우가 있다.
우월함과 열등함, 잘하고 못 하고 가 더는 중요하지 않는 관계에서 나의 약점은 단지 조금의 불편함만 초래할 뿐이다.
도리어 약자에게 찍힌 불명예스러운 낙인은 개인적인 유대 관계에서 한 번 더 신경 쓰고 보살펴 줄 문제가 된다. 즉, 다소 이기적이고 계산적으로 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적인 관계에서 주홍 글씨는 극복 가능한 영역에 있다.
그리고 이를, 선의의 일종으로 해석한다면 선의의 거리는 딱 여기까지다.
가까운 사람에게서조차 우려 섞인 시선을 받을 수 있고, 모진 말 한마디쯤은 들을 수 있다. (친구라면 고맙다고 미안하다 말하며 이해받을 수나 있지)
그러나 개인적인 관계에서 발생한 작은 피해는 앞으로의 관계를 통해 다양한 방면에서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양해를 구하기 쉽다. 또 설사 그러지 못하더라도, 일회성인 경우가 많아 너그럽게 선심을 베풀기 용이하다.
그러나 불이익을 받아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 가능한 까닭은 의무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선택의 여지가 있어서이다. 내가 원하는 대상에게 원하는 순간, 원하는 만큼 기여할 수 있다. 지속적이지 않으며, 책임과 의무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어떨까? 통용이 될까?
선의,
선심,
개인적인 호의의 표현
나는 불가능하다 느낀다.
지속적인 도움은 버거워서? 각자 맡은 업무만으로 이미 힘드니까? 정해진 시간 내에 끝마쳐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내 몫의 일이 아닌데, 상대의 미진함으로 인해 나에게 떨어지는 추가적인 일이 귀찮기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개인 사이에서는 가능한 관용이 집단에 적용되는 순간 불가능한 일이 돼 버리는 걸까?
때는 신규 약사가 많이 나오는 연초였다. 코로나로 폐업한 약국이 늘어 일자리를 구하는 약사가 참 많기도 했다. 만약 내가 두통을 자주 앓는 걸 알았다면, 약국장님은 지원한 그 많은 약사 중 과연 나를 뽑았을까? 나는 장담할 수 없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아니, 안 했을 것이다.
통증이 잦으면, 집중도가 떨어지고 그만큼 실수할 확률이 높아진다. 어느 일이든 실수는 지양해야 하겠지만, 인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의약품을 다룰 때는 더더욱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수는 늘 발생한다)
내가 아픔으로써 일에 영향을 주고, 내가 맡은 일을 잘 해낼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을 제치고) 나를 고용할 이유가 없다. 혹, 일적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해도 차질을 줄 수도 있다 판단한다면 나를 뽑지 않을 것이다.
(낭패인 일이다) 뭐라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선택에는 단순한 호오를 떠나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 누구나 머릿속 계산기를 굴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결정을 한다. 이로 인해, (아픈 것 자체로도 힘든데) 사회생활을 하는데 페널티를 받을 수 있다.
아픈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닐 텐데, 두통보다 확연하게 밖으로 증상이 드러나는 경우는 어떨까?
정말 그럴 수도 있다. 사람이 실신할 수도 있고, 느닷없이 잠이 들 수 있고, 발작 증상을 보일 수 있다.
아프다는 이유로 맡은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운전이 그렇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위험이 있다면 큰 사고를 초래할 수도 있다. 운전 중 갑자기 실신을 하거나, 잠이 들거나, 발작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면 버스기사, 기관사 등의 운전업무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위 질환자는 운전면허 취득 시 주의를 요한다)
이미 약을 복용 중이고, 관리가 잘 된다 하더라도 증상이 실존한다면 그 잠깐의 위험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직업적인 이유로 정말 해서는 안 되는 (할 수 없는) 일도 있을 것이다.
내가 아프지 않다면 벌어지지 않을 문제기에 뭐라 반박할 수 없다. 나를 거부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특정 업무를 하는데 정말 내가 부족하다면 말이다.
아픈 게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공동체에 누를 끼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정말 내 병이 일에 직접적인 지장을 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이력서 형식을 보면 기본적으로 가족 사항, 학력, 경력 등의 란이 있다. 보통은 공백으로 두고 무심하게 지나갈 '병력' 란에서 멈칫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병력 하나만으로 결혼, 취직 등에서 차가운 현실을 맞닥뜨리게 될 수도 있다.
두통 환자는 본인이 표하지 않는 한, 밖으로 드러나는 어떤 징후도 없다. (일차성 두통일 경우, 영상검사를 해도 아무 이상이 없으며 환자가 표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통증의 유무를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다면 모른다는 막강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직업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을까 겁이 났다.
병이 현재 진행형일 때, 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해도 우연찮게 내 병력을 알게 된다면 직장에서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둘까?
그래, 아무 문제없이 그동안 잘 일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러라고 할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있던 관계를 냉정하게 끊지는 않으리라 낙관할 순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 들까? 만약 처음부터 알았다면, 고용 시점에 내 질환을 알았다면 나를 고용했을까?
아니
일하는데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해도 나를 고용하진 않을 것이다.
조금의 위험부담도 지고 싶지 않을 테니까.
현재 아프지 않더라도 과거의 기록만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재발의 가능성이 불안하니까.
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조금 불편할 뿐 건강한 일반인과 큰 차이 없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때는 어떠한가?
대다수의 일은 그렇다. 두통이 있어도, 실신을 해도, 기면증이 있어도, 뇌전증이 있어도 대부분의 일은 증상이 발현할 때 잠깐 중지해야 할 뿐, 평소에는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지 않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다는 이유로, 그리고 아팠다는 이유로 우리는 실재적인 차별 속에 놓인다.
일에 지장을 주지 않아도 내 질환을 드러냄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몸을 사렸다.
누구 하나를 책할 일은 아니나, 공동체 사회에서 환자는 약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