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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약 Oct 20. 2022

편두통을 숨기는 이유 6 - 주홍글씨 ②

나도 아프고 싶지 않아




엄마 친구 딸로, 종종 근황을 전해 듣는 친구가 있다. 몸이 약해 자주 골골거리고 아프다고 하는데, 솔직히 듣기 썩 반가운 내용은 아니지만, 나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간간이 전해지는 소식을 놓치지 않고 있던 참이었다.

하루는 이 친구가 친구들과 놀러를 갔는데,







너는 왜 맨날 아파?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니, 얼마나 자주 아프길래 이런 말을 듣나 싶으면서도, 아프다는 사람한테 이렇게 되묻는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허물없이 자주 만나는 사이라면 가능할까 싶지만(실제로 어떤 사이인지는 모른다), 나로서는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에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이 대체 어디 있는가? 더군다나 친구랑 놀러 가는 마당에 말이다.

주변에 의료계에 종사하는 친구가 많아서일까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심이 깔려 있어서인지) 나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없다.

비슷한 상황, 다른 대응을 보자 무심코 넘겼던 친구들의 위로가 뒤늦게 더 고맙게 다가온다. 같이 놀러 갔는데 이런 말을 듣는다면 나는 상처받았을 테니까.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니고, 설사 내가 아프다 해도 같이 있는 시간은 고작 몇 시간, 혹은 길어야 며칠일 텐데 그 짧은 시간 '피해받았다' 여겨 뭐라 하다니 너무하잖아. (제일 힘들고 속상한 건 환자 본인인데)

그 친구도 아프고 싶지 않겠지. 물론 아프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들 즐거운 그 시점에, 분위기 잡치고 맥을 끊고 싶은 자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말하고 보니, 겨우 이 정도 가지고 피해라 할 수 있나 싶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잖아!)

























배려받아야 하는 위치




그냥 지나가는 말로, 아무 생각 없이 너는 왜 그리 자주 아프냐 말했을 수도 있다. 혹 궁금해서 또 걱정돼서 물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를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타박하려는 의도가 아니어도 그럭저럭 비등하다 여겼던 우리의 위치에 변동이 생긴다.

격하된다. 서로 동등하지 아니하고,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아량을 베풀고 이해해 주는 입장이 된다.

필연적으로 상대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우연히 엄마 친구 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제법 운이 좋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서 어떻게 해.


얼른 좋아지길 바라.


걱정된다.


기도할게.







 





지금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위로의 말, 나를 걱정하는 안쓰러운 표정, 아래로 내려가는 입꼬리, 그와 함께 축 처지던 공기마저도.

나를 향한 걱정 어린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어떤 실질적인 변화를 야기할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너와 내가 다름에 거리감이 느껴지는 한편, 이상한 탈력감이 찾아왔다.


동시에 내 마음 저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편함마저 도사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배려받아야 하는가. 나는 언제까지 배려받을 수 있을까? 나는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당장 관계가 변하지 않더라도 나는 관계의 위기를 느꼈다. 고마웠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배려받는 이 상황을 그리 건강하게만 바라볼  없었다. 나로서는 근 시일 내에 '변할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변하지 않는 문제






아프니까. 이해하지 못하니까. 도움을 줄 수도 없으니까. 혼자 쉬는 게 나으니까.

여러 이유로 내 아픔을 공유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처한 상황이 일시적이었다면, 말하기 한결 쉬웠으리라 생각한다.


근데 지속적이잖아.
계속 이어지잖아.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아플 때마다
맨날 이야기할 거야?

나는 매번 배려받아야 해?



그게 가능해?





아픈 사람이 있으면 걱정되고 신경 쓰인다. 내가 신경 쓰지 말라 해도 상대는 알게 모르게 양보를 하고, 어쩌면 강제로 주어진 상황에 원치 않는 배려를 해야 할 수도 있다.

도움과 배려, 이해에 감사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문제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만다. 가시적인 기간 내에 한동안 좋아질 일 없이, 앞으로도 이어질 문제이기 때문에.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닌데, 좋지도 않은 관심을 구하고 배려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내가 받은 배려를 돌려주기 힘들다는 사실이 짜증 나고, 상대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불안정함이 불안하게 다가온다. 일방적인 배려에 미안함을 느끼고, 무능함에 좌절한다.


아프다는 이유로 나는 무력해진다.  
























일방적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





미리부터 잡혀있던 약속을 갑자기 취소하고, 약속 중간에 아파서 집에 가버리길 반복한다면 관계가 지속되기 힘들 것이다. 실상 나는 아프다는 이유로 약속을 취소한 적도, 중간에 먼저 자리를 뜬 적도 없으면서 이런 걱정을 했다.
막상 따져보면 크게 민폐 끼친 일이 없는데,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다소 강박적으로 반응했던 것은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내 아픔을 이해해 주지 않는 타인에게 섭섭함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는 '선택의 영역'에 있는 내가 홀로 외롭게 남겨질까 두려웠다. 배려와 양보도 한두 번이지, (나는 단기간에 좋아지지 않을 텐데) 언젠가 아픈 나에게 질려 멀어질 것만 같았다.

 

일방향적인 배려는 사람을 지치게 해서 언젠가 귀찮고 힘들다는 이유로 나를 멀리할 것만 같다. 나조차 나에게 질리고 지겨워서 버릴 수 있다면 버리고 싶은데, 상대가 그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배려는 잠깐이고, 내 약한 살갗만 벌건 상처를 무방비하게 드러낸다. 주변 사람들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고,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된다.

나를 생각해 약속 장소를 우리 집 근처로 잡았을 때, 내심 좋으면서도 미안했던 것은 내가 가까워진 만큼 상대는 더 긴 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받는 것처럼 잘해주고 싶었다. 나도 배려해 주고 싶고, 받은 그 이상은 못되더라도 받은 만큼은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러지 못해 미안하고 또 분한 마음이었다.

























관계의 지속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불이익을 피하는 선택을 한다. 저절로 불어나는 마법의 곳간이 없는 한,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사는 인간이 이해타산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단발성이면 몰라도) 장기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적어도 상대에게 손해는 끼치지 않아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아픈 나'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아량에 기대는 부분이 있고, 아무리 봐도 짐이 되면 됐지, 이득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당 기간 상대의 배려를 구해야 한다. 아프다는 이유로 내가 쓸모없고 무가치하다 생각진 않았지만, 때때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양해를 구해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뒤떨어지잖아) 나는 뒤처진다 느꼈다.

그러나 내가 이득이 되고, 잘해야만 유지되는 관계라면










과연 유지하는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끊어질 인연이라면 언젠가 끊어질 테다.
민폐 끼치면 어때.
좀 짐이 되면 어떤가.
그냥 그런 거다. 어쩔 수 없는 거다.

내가 아픈 게 변하지 않는 현실이라면, 그에 맞게 새로운 관계를 쌓아나갈 수밖에 없다. 건강을 지키지 못해 받아들여야 할 결과라면, 받아들여야지 뭐 어떡하겠나.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조금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나와의 관계를 유지할 사람도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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