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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약 Oct 28. 2022

편두통을 숨기는 이유 8 - 주홍글씨 ④


합리를 떠나서






질환에 대한 편견 때문에 차별적 시선을 받는다. 일을 할 수 있고, 일을 하는데 실질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차별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반대 입장에서 나라고 다를까 싶다. 어쩌면 내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는 동료와 함께 일할 수 있을까? 어딘가 하자 있는 사람과 인생을 꾸려갈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 거부감 없이 선뜻 내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 동료로, 친구로, 배우자로 언제 어떻게 돌발적으로 아플지 모를 사람을 편견 없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라고 아픈 사람부터 걸려내지 않을까?









미래는 알 수 없고, 언제 누가 아플지 모를 일이다. 언제나, 항시, 모든 때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유추하고, (미래에 아플지 어떨지 모를) 현재 건강한 사람보다 이미 아팠던 전적이 있는 사람이 경쟁에서 후 순위로 밀려나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테다. 


이해한다. 비난할 수 없다.
















작아진다






어떤 병인지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사회적인 인식에 따라 특정 질환의 보유자는 보통의 사람보다 편견 속에 살아갈 것이 자명해 보인다. 불명예스러운 낙인이 찍힌다.


안다. 낙인, 

나에게 찍힌 주홍 글씨. 

나도 누군가에게 찍었을 그 빨간 도장.



그러나 내가 작아져야 하는가? 내 잘못도 아닌데. 나도 아프고 싶지 않았다. 아픈 것도 억울한데, 이렇게 또 한 번 억울해져야 하는가?


나는 작아지고 싶지 않다. 내가 작아질 일이 아니라며 등을 곧게 피고 애써 당당해지려 한다. 그러나 주변 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패전국 왕자의 씁쓸한 뒷모습과 다를 바 없다. 

절실한 발버둥은 의미 없는 몸부림이 되고, 제아무리 고개를 꼿꼿이 추켜세운들 전쟁에서 진 패자의 말을 우리는 귀담아듣지 않는다. 약자의 말엔 힘이 없다.
















아파서 하자가 있다면






아픈 사람을 하자 있다 취급하는 꼴을 보면 솔직히 좀 웃기다. 아니, 자긴 평생 안 아플 줄 아나? 언제까지 건강할 줄 알고? 

어디서 나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래, (건강보험 재정 축내지 않고 주변에 짐이 되지 않게) 제 한 몸 잘 건사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제 한 몸 믿고 아픈 사람을 저어하기에는 사람은 생로병사(生老病死). 누구나 나이 들고 병들어 죽는다. 설령 태생부터 건강하고, 제아무리 몸 관리에 열심인 사람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모두가 약해진다. 










누구나 공평히 약자가 된다. 아픈 이를 약하고 보기 싫다는 이유로 멀리하기에는 언젠가의 내 모습이며, 찝찝하다는 기분 탓으로 밀어내기에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를 통틀어 볼 때) 살아가며 아프지 않을 자 하나 없다. 


아파서 하자가 있다면, 하자 없는 사람은 없다. 

세상에 병들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평생토록 하자 없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은 모두 늙고 아파 죽는데, 인간 본연의 모습을 어찌 이런 식으로 매도하는가. 아파서 하자가 있다면, 인간은 나빠질 일만 남은 끝이 정해진 슬픈 운명의 동물에 불과해진다. 
















관대함을 바란다






나 또한 언제 아플지 모를진대, 이렇게 걸러내고 나면 남아날 자가 없다. 언젠가 약해질 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병자에게 다소 너그러워지길 바라본다. 

사람이 모여 집단이 되고 사회가 된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우리 사회가 약자에게 좀 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길 소망한다. 


늙고 아픈 사람을 민폐나 끼치는 무책임한 사람으로 혐오하는 것은 병들고 쇠약해진 나 자신을 혐오하는 것과 다름없다.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일로 작아지고, 다 같이 미안해하기보다 서로서로 고마워하는 게 훨씬 더 좋지 않나? 이쪽이 더 합리적이고 인도적인 방향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내 입장이 되기 전까지는 모르는 게 사람이라서, 







나로 인해 피해를 입어서 미안해. 

도와줘서 고마워.









라고 말하면서도, 내심 '근데 너라고 안 그럴 줄 알아?'라는 말을 나는 가슴 한쪽에 품고 산다.

















서로가 서로에게






길거리를 보면 편의점, 미용실 다음으로 병원과 약국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수요가 있고, (사업자 입장에서) 일정 수입이 유지된다는 뜻이다. 

약국에 일하다 보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꾸준히 약을 먹나 싶어 놀란다. 아마 별일 없는 한, 죽기 전까지 계속 먹을 것이다. 노화는 멈추지 않고 아픈 곳은 늘어만 간다. 대다수의 경우, 복용하는 약은 하나씩 추가될지언정 줄지 않는다.


반면, 병원 밖 세상은 밝고 활기차고 바쁘게 돌아간다. 새로 지은 건물은 번쩍이며 위용을 뽐내고, 예쁘고 멋진 핫플은 끊임없이 생겨난다. 유명하다 소문난 곳은 평일 낮에도 어김없이 사람으로 가득하다. 

티브이에 나오는 어리고 어여쁜 싱그러운 이들을 보고 있자면 병에 대한 걱정은커녕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과 하등 연이 없어 보인다.  


아직 어리고 건강한 10대, 20대 그리고 노화가 본격적으로 덮치지 않은 삼사십 대까지는 그래, 확률적으로 정말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넘어지기 전까지 내가 넘어질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아직 경험하지 못해본 바, 평생 자신과 연이 없으리라 막연히 낙관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 아닌 이도 있을 테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대부분 그렇게 된다. 

근심이 없는 게 진짜겠는가? 밖에 드러내고 자시고 고려할 새 없이 급박하게 살거나, 운이 좋아 그럭저럭 버틸만하거나, 다들 그런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사는 것일 테다.


아프고 힘든 사람은 많다. 그러나 굳이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고 내가 낫나. 아니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나. 그렇다고 듣는 사람이라고 좋나. 뭐 그리 좋은 이야기라고. 내가 편두통을 드러내지 않은데 수많은 이유가 있는 것처럼 아픈 사람은 굳이, 애써 자신의 근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상에 아프고 힘든 사람은 많은데, 그를 위한 자리는 없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는 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 생각보다 많은 힘을 쏟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괴로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두려움 






'피해 주고 싶지 않다'라는 말 아래 배척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다. 이는 혼자가 되기 싫다는 말이며, 이 모든 게 겁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개인의 아픔을 이해받기 힘들다 해도, (아플 땐 혼자지만) 결코 혼자이고 싶지 않다. 


괜찮아지리라 여겼던 몸의 작은 변화가 어느새 내 손을 떠난 일이 되었을 때, 질병으로써 그 존재가 인지되고 명명 지어졌을 때, 덜컥 겁이 났었다. 


분명 질병 일으키는 두려움, 병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











아플까 봐. 

잘못될까 봐.

죽을까 봐. 












그러나 병 때문에 일어날 신체적 변화 말고도 질병이 야기할 사회적인 영향 또한 그에 못지않게 두려웠다.


아픈 사람, 약한 사람, 모자란 사람을 알게 모르게 무시했다. 나와 거리가 멀다고, 내가 뒤처질 일은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팔자 좋은 자랑 섞인 고민으로 치부하기에 앞서 나는 익숙한 위기감을 느꼈다. 내 일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나는 오히려 내 일이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멀리하고 싶었나 보다. 









차별당하는 걸 봤으니까. 


나도 차별했으니까.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약자를 향한 무시는 호불호의 문제보다 생존의 문제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우월하지 못해서, 뒤떨어지는 게 두려운 건 그저 잘하고 싶고. 잘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 아니다. 약자를 향한 혐오를 그동안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 너무 가볍게 취급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괜찮다






자연환경에서 병이 있는 개체는 저절로 낙오된다. 그러나 사람은 본능뿐인 동물과 달라서, (약육강식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해도) 약육강식의 논리만으로 일이 돌아가진 않는다. 

우리는 감정이 있고, 이상이 있고, 도덕이 있고, 논리가 있으며, 무엇보다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


아프다는 건 분명 약점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존중받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잘나지 않으면, 내가 잘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면, 혼자서도 잘하지 못하면, 우리는 정말 생존하지 못할까? 인간 세상에 이바지하지 못하면 살 가치가 없나? 


그럴 리가. 좀 피곤해질 순 있겠지. 내 말이 가진 힘이 정말 적어질 수 있겠지.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획득하는데 저지하는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뭐 그리 힘이 있나?) 우월하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더 나아가 무시당하는 일이 빈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누구도 내 삶을 부정할 권리는 없다. 










내게 앞으로 더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나는 죽어 마땅하지 않으며, 내가 살 가치가 없어지지 않는다.





나는,

잘못해도 괜찮다.

못해도 괜찮다.

약해도 괜찮다.

아파도 괜찮다.

짐이 돼도 괜찮다.

혼자라도 괜찮다.

외로워도 괜찮다.


우리는 그러해도 괜찮다.

뭐가 돼도 괜찮다.


당신이 나를 존중하지 않아도, 나는 괜찮다. 
















대안 1 - 사회가 바뀌어야지







정신과 의사들이 사람을 볼 때 (예리한 시각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에게서 아직 찾지 못한 미지의 문제를 발견하리라 우리는 기대하지만, 실제로 정신과 의사의 경우 정상인의 범주가 더 넓다.







위와 같은 내용의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손뼉을 짝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람은 무릇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다 아픈 순간이 있고, (안 아플 때도 있지만) 건강한 사람도 살다 보면 힘든 때가 있다. 

사람 사는 게 원래 좀 힘들고, 아픈 게 당연하다는 인식을 깔고 보면 정상인의 범주는 꽤나 방대해진다. 조금의 '하자'가 있는 사람을 걸러낸다기보다 어느 정도의 '하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하자'는 더 이상 '하자'가 아니게 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배려, 따뜻함, 너그러움, 관용으로 조금은 더 유연해지길 바란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그런 세상이 되길 바란다. 

정신과 의사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차별이 아닌 더 넓은 범주로 너는 또 다른 내가 되어,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안 2 - 내가 준비할 일






약자가 차별받는 건 그만큼 보통 사람도 살기 팍팍한 세상이라서 일 거다. 멀쩡한 사람도 살기 만만치 않아 너그러움을 발휘하기 힘든 거다. 안 그래도 살기 힘든데, 나를 괴롭히고 폐 끼치는 존재에게 관용을 베풀긴 힘들 테니까. 


사회는 나 혼자만의 뜻으로 움직이지 않지만 (소수로 되는 게 아니고, 당장 내 손을 떠난 일이라 해도) 나부터 바뀌어야겠다 싶었다. 


사회로 확장되기 전,








나 개인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게 있을까?








내가 약자의 입장이라면, 현실적으로 자영업을 택해야 할 것이다. 내가 사장님이 되는 거다. (이렇게 사장님이 되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내 뜻대로 하려면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 손에 힘이 있어야 한다. 

실질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힘. 나만의 힘이 있어야 앞이 안 보이는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나를 위한 자리가 없다면, 고용자가 아니라 고용주가 되자. 남이 나에게 주는 일자리를 기다리지 말고 능동적으로 내 자리를 만들자. 선택받지 못한다면, 선택할 능력이 있으면 된다. 

















대안 3 - 나의 태도







그러나 언제나 내가 약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서, 힘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한 번 더 배려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학생 때 미워하던 애가 있었다. 나 말고도 그 애가 모자라다 생각하는 애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리 생각만 할 뿐 화를 내거나, 밖으로 드러내거나,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다. 

미우면 안 보면 되는데, 나는 무시가 되지 않았다. 웃기게도 나름 친분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화를 내지 말아야지 싶으면서도, 그 애랑 같이 있으면 화가 났다. 그 애의 모자란 부분에서 내가 보였다. 화를 내는 게 부당하다 여겨져 끓어오르는 화를 멈추고, 그 애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또 차마 외면할 수 없는 마음에 가까워지며 어중간한 거리를 유지했다. 

내가 미워하던 그 애는 나의 모자란 부분을 자꾸 떠올리게 했고, 밖에서 볼 땐 나와 비슷한 점을 찾는 게 오히려 더 어려웠지만, 나는 아무도 모르게 그 애에게서 나를 보았다.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우리 셋은 친했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은 내가 미워하는 그 애에게 잘해줬다. 

모자라고, 못나서, 좀 잘했으면 좋겠기에 짜증까지 유발하는 그 면모를 알면서도, 아니, 아니까 조금 더 챙겨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미워하던 애에게 잘해주는 게 좋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는 그 애의 몫도 있었다. 내가 잘해주고 싶지만, 잘해줄 수 없었던 그 애를 챙겨주는 모습이 좋았다. 

멋졌다. 관대하고, 마음이 넓고, 대단해 보였다. 그 사람이 나도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애를 왜 미워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을 왜 좋아했는지 이제는 안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은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었고, 동시에 모자란 그 애를 대하는 것처럼 내 모자란 부분을 받아들여 줬으면 싶었다. 












사람을 보고 어떤 판단을 내리거나, 한 사람에 대한 내 의견을 표하는 걸 꺼려했다. 좋아하지 않다 뿐이랴. 무례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럴 권리와 권한이 깜냥이 같은 한 사람일 뿐인 나에게 있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새로이 정하려 한다. 사람을 판단하겠다. 그 첫 번째 잣대를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두겠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을 기억하며, 되고 싶은 인간상을 다시금 떠올린다. 











홍익인간, 

배려, 이타적, 

관심,



힘이 되어주는 말 한마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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