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여느 여행과 다름없이 10년은 넘게 쓴 내 사랑스러운 캐리어를 끌고서 대만에 들렀다. 그간 여행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 캐리어 G가 내 속을 썩이고, 태우고, 다시 회복시킬 줄은 상상도 못 하고 말이다. (여행동반자로서 회색이었던 녀석을 Grey의 G라고 부르겠다.)
G는 26인치 크기로 25kg까지 너끈히 들어가는 큰 캐리어이다. 대만 수도 타이베이에 도착하여 호텔로 가는 길이었다. 신랑이 G를 끌고 가는데 너무 힘들다고 했다. 나는 겉으로는 힘듦을 통감한다는 듯한 안쓰러운 표정으로 "에고 10분만 걸으면 되긴 하는데, 그냥 택시 탈까?"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사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작 20kg 들어있는 캐리어인데, 그렇게 힘들까?'
신랑이 먼저 귀국하고 아이와 나만 대만에 남아 G를 끌어 보고서야 문제를 제대로 인지했다. 호텔을 바꿔서 다른 호텔을 이동하려는데 정말 울고 싶었다. 아니, 실제로 눈물이 났을지도 모른다. G를 끌고 앞으로 나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설상가상 주변에 택시도 없었다. 게다가 골목길을 지날 때는 인도도 없는데 차와 오토바이가쌩쌩 지나쳐서 아이도 챙겨야 했다.
걸어서 10분이면 갈 거리를 15분이 지나 반쯤 갔을까. 이건 물리적인 결함이 생겼다고 신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바퀴를 보니, 바퀴 커버가 찢어져 바퀴가 돌아가지 않게 바퀴 돌아가는 구멍을 막고 있었다. G는 망가져있었다. 당장 내다 버리고 싶었다. 울먹이며 G를 끌고 가고 있는데 걸어가던 대만의 중년 남자분이 대만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대만어를 하나도 할 줄 몰랐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다정한 눈빛과 이해한다는 표정은 "내가 도와줄까?"라는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느낌이었다. 나는 정확한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도움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주인을 기다리던 개가 주인이 돌아와서 반갑다고 꼬리를 흔드는 양 '예스, 플리스! 땡큐'라며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응했다. 길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정말 고마웠다.
그러고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결심했다. G를 버리기로. 새롭게 여행을 동반할 캐리어를 구하러 쇼핑몰에 갔다. 여기서도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름아닌 캐리어 매장 직원이었다. 50대쯤 되어 보였고 딱 봐도 이 쇼핑몰에서 오래 일한 것처럼 보이는 베테랑 여자분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영어를 어느 정도 알아듣기만 하고, 영어로 대답하진 못 하셨다. 매장을 둘러보니 마음에 드는 크기의 캐리어가 예상 범위의 가격이길래 사려고 했다. 그런데 관세 면세를 조금이라도 받아 돈을 아끼려던 게 화근이었다. 언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면세를 받으려다 보니 대화가 자꾸 어긋났다. 그와중에 기다리다 지친 딸내미는 옆에서 언제 가냐고 자꾸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입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가려던 찰나, 다른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손님 2명이 매장에 들어왔다. 직원은 막 들어온 그 손님들에게 자기를 대신해서 나와 영어로 대화해달라고 부탁 같은 요구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손님 S와 J는 마침 K-POP에 관심이 많고 한국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생기니 부탁을 응했다고 한다.
이 실로 어이없는 상황에서 S와 J는 처음에는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 부끄러워했지만, 이내 마치 내 원래 친구였던 것처럼 나와 직원을 중재해 주었다. 1시간 동안이나 말이다.
우리가 소통한 대화는 대부분 이러했다.
*S : K팝을 좋아하고 수줍음이 많다. 영어는 못하나, 한국어를 배우고 있으며, 쉬운 한국어는 대부분 알아듣는다.
J : 절친이 K팝을 좋아해서 조금 관심이 생겼고 잘 웃어준다. 영어로 짧은 의사소통 가능하다.
매장직원 : (대만어로) 서류 읽어보시고, 여기에 서명을 하시라고 전해줘요
J : (영어로) 여기 서명하시래요
나 : (한국어로) 아니 그래서 공항가서 관세 면세 부스에 가야하는건가? 이걸 어떻게 영어로 말하지?
S : (대만어로) J야, 이분 관세 부스에 가야하는지 궁금한가봐. 저기요, 공항가서 출국 해야해요?
매장직원 : (대만어로) 네, 근데 먼저 여기 지하 1층 서비스데스크에 들러야 해요.
J : (영어로) 저기, 서비스테스크 가야한대요
나 : (영어로) 아 그래요? 복잡하네요. 어떻게 가죠?
S : (한국어로) 우리. 같이. 가요.
나 : (한국어로) 잉? 아니에요.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어요. 괜찮아요!
영어와 한국어, 대만어가 뒤섞인 엉망진창 혼란스러운 대화였지만, 그들 모두는 서류를 설명해주고, 또다른 서류를 떼어오는 동안 시종일관 자상했다. 그리고 웃으며 나를 대해주었다. 내가 계속 너네도 손님이니 나 이제 안도와줘도 된다고 가라고 했는데도, 쇼핑몰에서 나와서 택시탈 때까지 안내해주었다. 새 캐리어를 사야하는 이 상황이 나를 암울하게 만들었는데, 생전 처음보는 S와 J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를 베풀어줘서인지 마음이 히터를 틀어둔 것처럼 따스해졌다.
대만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인간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호의를 베푸는 걸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로 서로서로 엮여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래서 서로 지면에서 지하로 추락하려고 하면 실이 다른 사람을 당기게 되고, 가장 가깝게 있던 사람이 가장 세게 당겨져서 추락하려 하는 사람을 구해주는 장면도. 기본적으로 다수와 이어져 있어서 누구라도 누군가를 돕는다. 인간이 고등동물이어서 선조의 선조 때 우리 서로 엮자고 이야기를 한 거고, 그게 아직도 신토불이 신조로 이어진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실을 당겨서 떨어지기 직전의 타인을 살려준 사람은 '뿌듯함'이라는 선물을 받는다. 정신이 발달한 동물이 '고마움'과 '뿌듯함'을 느끼고 '행복'을 얻는 굴레가 자주 돌아가길 바랄 뿐이다.
캐리어 살 때 도와준 손님 중, S와 나는 굵은 실로 엮인 친구가 되어, 나에게 가끔 SNS로 메시지를 보내준다. 내 오랜 친구 캐리어, G를 떠나보낸 자리를 새로운 친구 S가 메꾼다. G야 안녕, S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