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따뜻하고 밝은 것들이 내 마음을 따스하게 만든다. 버스 창문으로 내리쬐는 아침 햇살이 짜증나지 않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아무 목적없이 거리를 걷는 것이 신이 나서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머릿결이 휘날려도 기분이 좋아진다.
바야흐로 그렇게 봄이 왔다고 생각했다. 겨우내 가볍다고 입고 다녔던 오리털 패딩이 덥다고 느껴졌던 어느 날, 나는 몸살을 달고 집으로 왔다.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몸이 나이값을 치루는지 며칠을 골골거렸다. 그래도 엄마는 강한 법인지 기숙사에 있던 아이가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몸살을 솜처럼 가볍게 털어버렸다.
이제 봄이라고 겨울패딩을 세탁해서 넣을 생각을 했더니 주 초반에 대설주의보가 들렸다. ‘설마 3월 중순인데 눈이 오려고!’ 내 마음은 일기예보를 믿지 못했지만 로또를 맞춘 것처럼 예보는 들어맞았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쌓여 있었다.
3월은 새학기 시작이라서 아이들 따라 내 마음도 들썩거린다. 학교에서 가지고 오는 안내문이 많아서 그만큼 확인하고 써야할 것도 많다. 기숙사에서 나온 아이가 가져온 안내문을 읽고 동의하고 서명한다. 중학생 아이가 가져온 안내문도 마치 서류 결재를 하는 말년 과장처럼 이름을 써넣는다.
그렇게 바쁜 평일을 지나고, 주말이 다가오니 벌써 3월 중순에 다다랐다. 아침에 일어나 가족들을 회사로, 학교로 보낸 후 멍하니 앉아있다가 TV를 틀었다. 리모컨을 들고 있지만, TV에서 나오는 내용은 그저 무의미하게 마음을 흔들기만 했다. 그러다가 구독하고 있는 OTT를 켜니 봄이라는 듯이 달달한 프로그램들이 보였다.
리모컨만 하릴없이 누르다가 지나간 한 드라마에 눈길이 머물렀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드라마로 스물 아홉 경계에 선 음악 학도들의 사랑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화면이 화사한 것이 마음에 들어 머뭇거리다가 ‘나한테도 저런 풋풋한 시절이 있었을까?’하는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브람스는 슈만의 제자로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를 평생 짝사랑했다. 드라마의 내용도 서로 어긋난 사랑을 담고 있었고 그 속에서 풋풋한 사랑이 싹트기도 했고 스물 아홉에 어울리는 삶의 고민도 있었다. 제목처럼 클래식한 감성이 돋보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풋풋함은 지금의 나하고는 거리가 있어서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스물 아홉의 나였다면 그 속에서 함께 소용돌이쳤겠지만 나는 이미 그 소용돌이를 벗어났고 감성보다는 이성이 앞서는 나이가 되었다. 스물 아홉의 감정선이 지금의 내게는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의 감정은 차분해졌고, 그 풋풋함이 가슴 속에서 멀어져 갔으니까. 꽃샘추위가 다가왔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 마음 속에는 봄이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