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떠보니 밖은 아직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눈이 내렸나 하고 부엌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눈이 내린 흔적은 없었다. 뉴스를 켜보니 서울 지역에 눈이 많이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눈이 내리면 번거롭긴 하지만 여기도 눈이 내렸으면 하는 작은 설렘을 가져보았다.
남편이 거실로 나오더니 오늘 눈이 많이 내릴 거라고 말한다. 아침을 먹고 남편과 아이들을 현관에서 배웅한다. “엄마, 학교 갔다 올게.” “나도 다녀올게.” 아이들과 남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다녀와.”라고 말한다.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남편과 아이들의 키가 비슷해서 언제 저렇게 컸나 싶었다.
오전에 아이 고입 상담으로 학교에 가야 해서 아침 시간이 더 분주하다.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에 남아있는 화분을 거실로 들였다. 아레카야자, 셀렘, 콩고, 극락조, 녹보수 등 조금 큰 화분을 거실로 옮겼더니 거실이 그새 꽉 찼다.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널고, 분무기를 들고 거실에 있는 식물들에 분무도 하고 어항 속 구피에게 먹이를 준다. 소소하게 반복되는 일들을 하다 보니 버스 탈 시간이 되어 서둘러 집을 나섰다.
하늘에서 흰 눈이 펑펑 내린다. 어느새 나무에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눈 위를 신나게 도는 강아지처럼 나도 신이 나서 하릴없이 발자욱을 찍어본다. 눈을 밟을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내 발끝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나뭇잎을 다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눈이 하얗게 내려앉았다. 미처 잎을 떨구지 못한 나무에도 여지없이 겨울이 들이닥쳤다. 버스 안, 라디오에서는 눈과 관련된 노래들이 흐른다. 창밖에 내리고 있는 눈이 낯설게 느껴진다. 강원도나 가야 볼 수 있는 함박눈을 올겨울 첫눈으로 맞이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학교 교정에도 할머니의 흰 머리처럼 눈이 소담스럽게 내려앉았다. 흰 눈 사이로 언뜻 보이는 빨갛게 익은 산수유 열매가 붉게 칠한 입술처럼 선명하다. 걸어온 길 위에 내 발자국이 깊게 남았다. 준비도 없이 겨울을 맞기는 나무나 나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겨울이 한꺼번에 닥칠 줄은 몰랐다. 수줍은 색시의 걸음처럼 조심스럽게 올 줄 알았더니 폭설로 몰아치고 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조심스럽게 즈려밟고 가는데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신나게 놀고 있다. 내 아이가 혹여 저 무리에 있을까 발걸음을 멈추고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우산에 쌓인 눈을 털고 외투에 묻은 눈을 털고 마음도 털어본다. 오늘은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아이의 진학 상담을 해야 한다.
회의실 앞에서 아이와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회의실 안에서 고등학교 상담 선생님을 기다리는데 아이 손이 발갛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운동장에서 신나게 놀았다고 한다. 아이의 붉어진 손을 어루만져준다. 내 손길에 사춘기 아들이 수줍게 웃는다. 얼마나 신나게 놀았길래 이 겨울에 땀을 흘리니 묻고 싶지만 참는다.
선생님이 진지하게 학사 일정을 설명하는 동안, 아이는 어느새 지친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끄덕이는 모습이 어쩐지 애틋했다. 선생님이 밤 12시까지 자습을 언급하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렇게까지 공부를 시켜야 하나 싶어서 선생님을 쳐다보니 수도권 대학교에 가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K-고등학생의 비애가 느껴졌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듯 겨울도 그렇게 당연히 오는 것이겠지. 하얀 눈은 끝없이 내리고, 마음도 눈처럼 흩날리는 날이다. 라디오에서는 하루종일 눈과 관련된 노래들이 흐르고 그 노래에 실려 내 마음은 솜이불 같은 저 너머로 달음박질치고 있다. 어느새 겨울이 되었고, 나의 마음도 그 흰 눈 위에 발자국처럼 새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