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등교하고 소소한 집안일을 하는 아침, 라디오에서 진행자의 잔잔한 멘트가 흐른다. "이제 동지가 얼마남지 않았지요. 동지를 앞두고 한파가 예상된다고 하는데요, 우리 선조들은 '구구소한도'에 그려진 매화를 하나씩 색칠하며 추운 겨울을 지혜롭게 보냈다고 합니다."
이제 동지가 이틀 남았다. 동지는 24절기 중 스물 두 번째 절기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동지를 기점으로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년에 비해 크게 추운 날씨는 아니지만 동지를 앞두고 한파가 예상된다니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오늘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도서관에 상호대차도서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도서관에나 가보려던 참이다. 라디오를 켜고 하릴없이 노트북을 앞에 두고 앉았다. 겨울처럼 푸근한 라디오 DJ의 멘트에 내 마음에 벌써 봄이 온 느낌이였다. 더군다나 '구구소한도'라니! 무언가 새롭게 알아간다는 건 늘 마음 설레는 일이다. 인터넷 창을 열고 '구구소한도'를 검색해본다.
'구구소한도'는 명나라 유동이 쓴 '제경경물략'에서 나온 말로 이것을 구구소한(九九消寒)이라고 했다. 구구팔십일, 81일을 하루하루 끄면서 추위를 밀어낸다는 의미로 81개의 추위를 꺼야 매화가 핀다고 한다. 매화를 그리고 동지를 기점으로 매일 하나씩 색칠하다보면 봄이 온다니! DJ의 설명을 듣다보니 선조들의 지혜에 새삼 탄복했다. 매일 매화를 색칠하면서 따듯한 봄을 기다렸다니 얼마나 운치있는 일일까?
그러고 보니 작년에 매화를 그리면서 겨울을 보냈던 기억이 났다. 추운 겨울,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봄풍경을 그리면서 온기를 찾았다.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봄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다보면 얼었던 마음이 스스르 녹는 기분이었다. 올 겨울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라디오를 들으면서 뭔가 해보려는 생각을 하니 어느덧 봄이 내 앞에 당도한 느낌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구구소한도'를 검색하니 다양한 그림들이 스르륵 내린다. 우리 조상들은 동지일로부터 81일이 지나면 봄이 온다고 해서 81개의 원으로 매화를 그리며 봄을 기다렸다. 이루고 싶은 소망이 봄과 함께 찾아온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니 나도 매화를 그리며 봄을 기다려봐야지 싶었다. 하루에 하나씩 원을 색칠하다보면 어느새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겠지! 이렇게 또 추위에 맞설 일상의 무기가 생겼다.
(이미지출처 : 네이버)
이미지가 있다면 프린트를 해서 원을 하나씩 색칠하거나 붓펜이나 먹 등을 이용해서 직접 매화나무를 그려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붓펜으로 화선지에 매화나무를 그려볼 생각이다. 매화나무에 하나씩 매화를 그려나가다보면 봄이 올 것이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런 상상을 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구구소한도'를 알게 된 오늘 아침이 특별하게 와닿는다. 추위로 자꾸 움츠러들 것이 아니라 내 삶에 활력이 되어줄 것들을 찾아보면 어떨까? 이번 동지부터 나는 매화나무를 그리고 하루에 매화 하나씩을 채워나가며 기나긴 겨울을 보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