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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한 중간에 서있어

by 소금별

“카톡” 별 계획이 없는 금요일 오전에 알람 소리가 울렸다. 뭔가 싶어서 확인했더니 책을 받으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지난 가을, 도서관에서 글쓰기 수업을 들었는데 드디어 책이 출간된 모양이다. 글쓰기 수업에 함께 참여한 학우들의 글이 실린 문집 형식의 책이다. 마침 그림책에 들어갈 ISBN을 받으러 갈 생각이었기에 집을 나서기로 했다.


일기예보에서 기온이 떨어진다고 했는데 생각만큼 춥지는 않았다. 목도리를 단단히 하고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느끼는 겨울 바람이 상쾌하다. 덩달아 발걸음도 가벼워 날아갈 듯 걷는다. 아파트 화단에 있는 낙상홍나무의 빨간 열매가 눈에 들어온다. 지날 때마다 습관처럼 바라보는 마가목 나무도 눈에 담아본다.


오늘은 운이 좋았는지 정류장에 가자마자 버스가 온다. ‘오, 럭키!’ 이게 뭐라고 작은 일로 행운을 부르짖는다. 평일인데도 버스 안은 사람들로 꽉 차있다. 이 시간에 다들 어디를 가는 걸까? 괜히 쓸데없는 일이 궁금해진다. 창 밖으로 겨울풍경이 지나간다. 수확이 끝난 논에 오리떼들이 점점이 박혀있고 개천의 물이 유유히 흐른다. 내 시선은 자꾸만 밖으로 향한다.


도서관에 도착하니 입구에 책들이 즐비했다. 조만간 공사에 들어간다고 하더니 책들을 나눔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로 서고에 보관했던 오래된 책들이지만 진흙 속에서 진주를 고르듯이 골라본다. 뤼팽이 나오는 추리소설 표지를 보자마자 어린 시절 밤새 책을 읽던 기억이 떠올랐다. 반가운 마음에 몇 권을 집어들었다.


2층 대출대에 올라가서 먼저 가져온 책을 반납했다. 이번에 반납한 책은 천선란 작가의 〈이끼숲〉이라는 연작 소설이다. “글쓰기 수업한 책 찾으러 왔는데요.” 책을 반납하고 도서관 사서에게 용건을 말한다. 사서가 책을 들고 와서 서명을 하라고 한다. ’벌써 세 명이 찾아갔네.’ 이번에는 ISBN을 찾아야 한다. “설화그림책 ISBN도 찾아가려구요.” 했더니 사서가 “아, 잠시만요.” 하더니 서류 봉투를 들고 온다. 반갑게 받아들고 신간 코너에 가본다.


오늘 목적은 달성했지만 도서관에 왔으니 책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간 코너를 매의 눈으로 스캔해본다. 1인당 50권씩 빌려준다고 하더니 많이들 빌려갔는지 서가가 휑하다. 책을 찾는 내 눈에 소설들이 보인다. ‘겨울에는 역시 술술 읽히는 소설이 제 맛이지!’ 손에 잡히는대로 신간 소설책을 집어들었다. 작가를 제법 안다고 생각했지만 모르는 작가가 더 많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소설책까지 넣으니 에코백이 제법 빵빵해졌다. 어깨는 무겁지만 도서관을 나서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운수대통인지 정류장에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버스가 온다. 좌석에 앉으니 따사로운 겨울햇살이 몸을 감싼다. 에코백에서 책을 꺼낸다. 문집 형식의 책에서 목차를 확인하고 내 글을 찾아서 읽는다. 에세이 몇 편과 창작동화 한 편, 디카시 두 편이 실려 있다. 글을 쓸 때도 읽고, 합평 할 때도 읽었던 글인데 다시 읽으니 새롭다. 글은 읽을수록 마법을 부린다. 읽을 때마다 글의 느낌이 달라서 미완성된 그림처럼 자꾸 붓을 들고 싶게 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찬 바람이 휘릭하고 나를 스치고 간다. 어느덧 겨울의 한 중간에 서 있는 지금, 12월이 올 한해의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나는 올해 무엇을 했나? 걸으면서 한 해를 필름처럼 돌려본다. 한 해가 이렇게 빠르고, 10년이 이렇듯 빠르구나! 짧아지고 있는 시간 속에서도, 어제와 다른 오늘이 있기에 희망은 피어난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희망은 겨울의 중간에서도 우리 곁에 머문다. 매일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 뭔가 특별한 게 있겠냐마는 오늘이 있기에 희망이 있지 않을까? 겨울의 한 중간에 서 있는 지금, 그래서 봄이 더 그리워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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