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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by 소금별

집안을 서성이다가 겉옷을 입고 산책을 나섰다. 겨울바람이 불었다. 공원은 운동을 하러 나온 몇 사람만 보일 뿐 한적했다. 겨울치고는 포근한 날씨다. 휴대폰으로 라디오를 듣는다. 오늘은 라디오마다 DJ의 멘트 대신 음악만 흐른다. 가슴이 내려앉는 날이다. 그래서 무작정 걷는다.


어느새 나무들은 나뭇잎을 다 떨구고 빈 가지만 드리운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로 치솟은 가지에 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는 산수유 나무가 보인다. 한겨울이라 그 붉은빛이 햇빛을 받아 루비처럼 영롱하게 반짝인다. 홍색잎을 달고 있는 남천과 앙상한 줄기만 있는 화살나무도 보인다. 모든 것이 어제와 똑같지만 어제와는 다른 오늘이 되어버렸다.


눈이 시리다. 문득 저녁 메뉴가 떠오르고, 이어지는 아이들 학업과 학원비 걱정에 마음이 얼어붙는다. 겨울은 이렇게 마음까지 춥다. 라디오에서 《Tiger in the night》 노래가 흐르니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진다. 무엇을 하든지 마음이 슬퍼지는 날이다.


바람이 분다. 오전에 김영하 소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 실린 단편 중에서 『바람이 분다』를 읽었다. 한 여자를 기다리는 그에게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바람이 내 뇌리에 불고 공원에 불고 있다. 이 바람은 어디로 나를 데려갈까?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정서적 공감인지, 인지적 공감인지 생각해본다. 다리는 트랙을 따라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다.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면 금방이라도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공원을 몇 바퀴 돌고 집에 갈 때 커피 한 잔을 픽업할까 생각한다. 내 의도와 다르게 머릿속을 휘젓는 수십 가지의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쓸려 나간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산수유의 붉은 열매와 좀작살나무의 보라색 열매가 햇살에 빛나지만, 오늘의 풍경은 어제보다 무겁게 와닿는다. 흐려지는 하늘처럼 마음이 침잠하는 하루, 그 사이로 바람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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