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처럼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겨울 오후, 걷고 싶었다. 집 근처를 걷기에는 슴슴해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으로 목적지를 잡았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이긴 하지만 차를 타고 가야하니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
.
오늘은 남편도 왠일인지 가자고 한다. 집돌이가 되어가는 사춘기 아들과 떨어져 우리는 집을 나섰다. “나 거기 알아. 예전에 가본 적이 있지.” 오늘 가려고 하는 산 이름을 대었더니 남편이 아는 산이라고 했다.
차를 위태롭게 운전하는 남편이 불안하다 했더니 얼마 못가서 가벼운 접촉사고가 있었다. “어,어!” 이미 차는 앞차에 붙어 있었다. 사고는 순간이었다. 아차하는 순간, 막을 사이도 없이 우리차가 앞차를 가볍게 들이받았다. “정초에 어디 가는 게 불안하다 했더니!” 남편이 굳은 얼굴로 말한다. 나는 괜스레 미안해진다. 비보호 우회전을 하는 차선이었는데 앞차가 가다가 서버렸다. 미처 보지 못한 남편이 “어!” 하는 사이에 앞차와 가볍게 접촉을 해버렸다. 우리는 잠깐 망부석이 되었다.
앞차에서 사람이 내리더니 손짓으로 저기로 차를 세우라고 한다. 당황한 남편이 차를 세우고 차문을 열고 나간다. 두 사람이 서서 뒷 범퍼를 보면서 뭐라고 이야기를 나눈다. 남편이 미안해하며 옷으로 범퍼를 닦는다. 앞차 운전자가 차문을 열고 수건 같은 걸 가지고 오더니 닦아보고는 귀찮다는 듯이 그냥 가라고 한다. 남편이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말한다.
새해부터 무슨 큰일이 날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가벼운 접촉사고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냥 집에 갈까?” 미안한 마음에 말을 꺼내니 남편이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한다. 또다시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남편 운전이 조금 불안하다 싶었다. 갱년기 증상인지 운전을 하면서 기분이 롤러코스터 타듯 변하기도 하고 주의를 하지 않는다.
남편이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대로 운전을 한다. “거기 옛날에 가봤는데 길이 좁더라.” 하면서 불안감을 내비친다. 오늘 가는 곳은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산이었다. 근처 카페에서 모임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 지나왔던 곳이다. 야트막한 산인데 등산로가 잘 되어 있어서 가볍게 걷기에 좋다고 했다. 그 말을 새겨들은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편에게 가자고 했고 오늘 그 산에 가는 길이다.
운전을 하는 남편 옆에서 나는 가봤던 길이라며 아는 체를 한다. 그때 이 도로를 따라 갔었어, 이 학교도 그때 봤는데, 맞아, 이 도로로 나왔어, 하면서 미더워하는 남편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남편도 예전에는 이런 도로가 없었는데 하면서 격세지감이라고 한다. 논두렁길이라 차가 지나가다 반대쪽에서 차가 들어오면 오도가도 못했었다며 옛날 이야기를 한다.
남편은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차를 몰고, 어느새 자동차는 시골 마을로 들어선다. 내가 갔을 때는 이런 마을은 없었는데 싶지만 남편은 내비를 따라간다. 이상하다. 왠지 이곳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갔을 때는 이런 마을은 없었어.” 하니 남편이 차를 돌린다. 분명 그 산은 보이는데 산 주변을 맴돌고 있는 우리, 가까운 곳을 가는데도 헤매는 이상한 날이다.
길을 따라 돌아나와 큰 도로를 달린다. 큰 도로가 좁아져 작은 도로가 나오고 자동차는 그렇게 위태롭게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그곳에 산이 있었다. 자동차 몇 대가 서 있고 이정표가 보인다. 해발 126m, 야트막한 산이다. 등산로 초입이 보인다.
남편과 나는 등산로를 따라 걷는다. 산이라지만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지라 힘이 들지 않는다. 가벼운 산책을 하듯 남편은 앞에, 나는 그 뒤를 따른다. 신발 아래 흙이 펼쳐져 있다. “집 근처 공원보다는 여기가 낫지?” 무안해서 그렇게 물으니 남편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산을 걸으며 예전에 갔었던 등산 이야기를 한다. 설악산 오색약수터로 내려오다가 조난당할 뻔한 일, 오대산에 갔다가 남편이 힘들어했던 일 등을 두서없이 꺼낸다. 아침 일찍 등산을 시작했는데 우리는 늘 해가 지고 나서야 산을 내려왔다. 더디게 걷는 내 탓도 있었을 것이다. 코로나 시절 우리 가족은 지리산, 오대산, 설악산, 대둔산, 태백산, 소백산 등 남쪽에 있는 산은 거의 다 올랐다. 그때는 갈 곳이 산 밖에 없었다.
수많은 발걸음이 지나간 흔적처럼 산길은 평평하게 다져져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길 위에 새겨진 듯했다. 사람들의 발길로 평평하게 다져진 산길을 걸으니 그동안 억눌렸던 마음이 위로받는 기분이다. “그래도 산에 오니까 좋지?” 남편 얼굴을 쳐다보니 아까 불편했던 마음이 다 지워졌는지 평온하다.
높지 않게 펼쳐진 능선을 따라 걸으면 어디로 갈까? 정상을 찍고 계속 걸어갔지만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 가야했다. 딱딱딱, 어디선가 나무를 찍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어보니 딱다구리가 있었다. “저거 쇠딱다구리지?” “저기 봐, 고라니 보여?” 나는 쇠딱따구리를, 남편은 고라니를 발견했다. “다음에 애들이랑 같이 오자.” 우리는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