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고는 마땅한 직업이 없어 빈둥대는 내 모습이 초라해서 나가기 싫었고, 결혼하고는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과 별거에 들어가며 아이랑 둘이 먹고 사느라고 혼이 빠져 갈 수 없었고, 남편과 다시 합치고 아이들이 커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을때는 늙어버린 펑퍼짐한 몸뚱이가 부끄러워 대학밴드만 간간히 들여다보며 숨어 살았다.
그러다 자궁암 검사 이상결과를 듣고 체중을 감량하기로 결심하며( 다이어트썰은 두달만에 10kg감량하기 편을 읽어 주시길 바란다) 친구들이 간절히 보고 싶었다.
88년에 대학 새내기였던 나는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선배들의 데모에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한눈에 반해 사귀게 된 선배가 총학생회 핵심 인물이라 그 선배의 손에 이끌려 나도 자연스레 총학생회에 일원이 되었다.
광주 사태에 저항하는 시위를 하다 전경에게 쫓겨 넘어져서 다치기 일쑤였고, 광주 전대협 출범식에 갔다가 경찰의 최루탄에 눈물 콧물 다 빼며 죽을 뻔하기도 했다. 살벌하고 공포스러운 시절이었다.
우리들은 순수한 열정과 분노와 두려움을 가지고 매일 붙어 다녔고 생사고락을 같이 했었다. 그들은 친구들이기도 했지만 가족이고 동지이자 연인이었다.
그런 그들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내 삶이 참담해서, 나를 사랑하던 선배를 배신하고 지금 만난 남편과 전쟁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나를 그가 알게 될까봐 가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도 아직도 불의에 분노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밴드에서 확인하면 아이를 혼자서 키우며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빴던 내 삶에 괴리감을 느꼈고 학교에서 제법 유명했던 나를 많이도 궁금해한다는 친구의 말에 더더욱 몸을 움츠리며 숨었다.
그리움에 사무쳤지만 마음 한 켠으로 미뤄두며 잊고 살려고 애썼다.
그러다 몸에 이상신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병원의 메시지를 보고 후회되는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그 후의 내 행적을 생각하니 이 메시지는 연금술사에 나오는 표지같은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중 가장 큰 후회가 그 친구들을 한 번이라도 만날걸 하는 생각이었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 위한 , 어쩌면 그 남자를 보기위한 나의 피나는 노력은 이전글에서 확인하시길)
5만원 이상의 바지를 사 본 적 없는 내가 무려 95000원이나 하는 캐주얼 정장 바지를 샀다. 흰 와이셔츠를 곱게 다려 바지 속에 단단히 넣고 옷이 구겨 질까봐 꼿꼿이 앉은 자세로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총학생회 기획부장을 했던 같은 학번의 남자 동창이 나를 동대구역에서 픽업해서 모임에 데려가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 30년만이라 서로 못 알아 볼까봐 잔뜩 긴장했다.
웬걸.... 그냥 알겠더라 ...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 애가 나를 보고 어금니가 하나 빠진 이를 벌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와 니 하나도 안 변했네 고대로다 우찌 이리 똑같노?"
6개월 전에 나를 네가 본다면 그런 소리는 못 할 것이다.
반가움에 울컥했다. 서로 힘주어 꽉 끌어안았다. 늙은 두 남녀가 서로 끌어 안고 있자 주변에서 흘끗거렸다. 우리는 서로 이 가시나야 이새끼야 너는 왜 이리 늙었냐 이빨은왜 빠졌냐 그러는 니는 머리가 왜 이리 휑하냐 어깨를 툭툭 치며 투닥거렸다.
약속 장소로 가자 모르는 얼굴이 한 가득이었다. 1기부터 20기까지 모인데다가 가족까지 함께하는 자리라 그 규모에도 놀랐고 ,낯선 얼굴들에 당황스러워 어쩡쩡하게 서 있었다.
그런 내게 몇몇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아 반가움에 어쩔 줄 몰랐다. 4기 선배들 6기 후배들 내 기수들의 사람들이었다. 늙었다. 아니 늙었지만 고대로였다. 서로 얼싸안았다. 한 시간이 지나자 술이 들어가서 그런건지 살가운 후배들 덕분인지 어색함은 가시고 애틋함과 그리움만 넘실거렸다.
모르는 후배 한 명이 다가와 술을 따랐다.
"선배님 꼭 뵙고 싶었습니다. "
"응? 너 나 아냐?"
"네 선배님들이 만날때마다 계속 선배님 얘기 하셔서 한 번 꼭 뵙고 싶었습니다." 한다.
또 울컥했다. 30년 동안 잊지 않고 나를 기억해 주었구나.. 모르는 까마득한 후배가 내가 누군지 궁금해 할 만큼.... 고마움에 눈이 벌개져 고개를 내렸다.
"야 너 온 김에 우리 대학 가 볼래? 많이 변했다."
간밤에 부어라 마셔라 하도 마셔대서 속이 울렁거리는 내게 4기 선배인 상철선배가 말했다.
"어? 진짜요? 갈래요 갈래요"
해장으로 국밥을 한 그릇 뚝딱 먹고 비슷한 기수 5명이 한 차를 타고 학교를 올라갔다.
들어가는 길부터 다 바뀌어서 이게 우리 학교가 맞나 의아했다. 온통 유리건물에 삐까뻔쩍한 학교를 보니 별 다른 감흥이 없었다. 추억을 느끼려고 했는데 남의 학교같은 모습에 실망스러웠다.
"많이 변했쟤?"
"그러네요......"
"근데 니 뒤로 돌아가면 깜짝 놀랄끼다."
"왜요?"
"가 봐라"
1호관 건물로 가니 정말 깜짝 놀라 입이 벌어졌다. 세상에 그 번쩍번쩍한 건물들 사이로 하얀 시멘트를 덕지덕지 바른 2층의 총학생회 건물이 30년동안 하나도 안 변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1층계단부터 올라가는데 몸이 간질간질하고 목구멍이 꽉 막혔다. 총학생회라는 작고 보잘것 없는 간판을 보자 기어이 울음이 터졌다.
"야들아. 임마 운다 크크크"
상철 선배가 나를 놀렸다. 2층에서 밑을 내려다 보니 등나무가 우거진 벤치가 있었다. 벤치는 색을 다시 입혔고, 등나무는 그 때보다 울창했지만 그 장소 그 곳에 그대로 있었다.
그 벤치에서 나는 선배들에게 무던히도 혼났다. 일 그따위로 하지 마라 때려쳐라 니만 힘드냐 그렇게 나를 갈구던 준영 선배는 서로 웬수처럼 지내다가 1년 후에는 죽고 못 사는 선후배가 됐었다.
난 그 벤치에 앉아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말그대로 오열을 했다. 같이 온 선배들과 후배들은 멀찌감치 피해주었다.
나를 그렇게 갈구던 내 선배 준영은 29살에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그 선배가 너무나 사랑했던 이 등나무벤치, 총학생회가 있는 이 건물에 선배의 유해를 뿌렸다는 걸 나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 선배의 장례식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가지 않았다. 결혼도 안 한 내 뱃속에(혼인신고는 했다)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삭의 몸으로 장례식에 가는 걸 극구 말린 어른들의 성화에 갈 수가 없었다.
29살 새파란 그가 있는 곳에 50이 넘은 내가 와 있었다. 죄스러운 마음에 매년 12월에 열린다는 그의 추모식에 올해부터는 무슨일이 있더라도 참석하겠다고 선배들과 약속했다.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동대구역에 돌아왔다. 처음 나를 픽업해준 동기놈도 같이 왔다. 열차시간이 서로 달라 그놈이 먼저 출발했다. 다음 모임에도 꼭 참석하라는 엄포와 함께 열심히 손을 흔들며 먼저 그애가 갔다. 나도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그놈이 다시 뛰어왔다. 왜 저러나 의아해서 보고 있는데
"너 진짜 예쁘게 잘 늙었어... 걱정하지마... 진짜 잘 살았어"
그러고는 또 빠진 이를 드러내며 웃고 간다.
이놈이 나에 대해 무슨 말을 들었나... 건너건너 내 힘든 삶을 들은 것인가..
내 생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말이었다. 그래 정의를 위해 외치는 삶만이 치열한 건 아니겠지? 어떻게든 아이와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나의 삶도 너희만큼 치열한거였지?
너희도 잘 살았고 나도 잘 살았다.
(앗!!!! 첫사랑 선배는 그날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후에 서울가서 따로 만났다. 아 이러면 제목을 바꿔야하나)
< 30년 동안 안 바뀐 총학생회.... 학교도 너무 하네 어찌 이리 돈을 안 썼을까 .. 하긴 지금 학장이 그때 우리한테 무던히도 시달린 학장의 아들이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