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나의 힘
영어에 관심이 없었다. 중학교 때는 하도 무서운 선생님을 만나 맞기 싫어 어쩔 수 없이 영어공부를 해야해서 성적이 아주 좋았다.(지금까지의 나의 영어 실력은 중학교에서 멈췄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니들 알아서 하세요 나는 내 갈 길 갑니다.'하는 선생님을 만나 나도 내 갈길 간다고 영어 수업내내 할리퀸 로맨스를 읽느라 바빠서 영어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성적에 맞춰 대학교를 동양철학과를 가니 한문에 중국어에 이상한 도교,유교 배운다고 (이것도 데모한다고 거의 출석 못 함) 영어는 코빼기도 못 봤다.
졸업하고는 30년간 국어와 논술을 가르친다고 우리글만 주구장창 공부하느라 영어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러다가 아이랑 대책없이 간 홍콩배낭여행과 일본배낭여행에서 언어가 안 돼 10분 만에 찾아 갈 호텔을 1시간을 빙빙 돌며 식은땀을 흘렸던 일을 계기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10년 전인데 구글맵도 볼 줄 몰랐고, 영어는 초등수준도 안됐다. 일본배낭여행은 진짜 할 말 많다. 이건 나중에 떠는 수다로....)
그 때 절실함은 다시 한글이 보이기 시작한 부산에 오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영어 못해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야 ,나 이번에 한국 들어가는데 나 나갈 때 한 달 간 우리집에서 같이 지낼래?"
중학교 때 같은 반 짝으로 만나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이민갈 때까지 한시도 안 떨어지고, 나의 온갖 흑역사를 아는 친구가 20년 만에 귀국을 했다.
여러 사정으로 1달 있다가 다시 들어가야 하는 친구는 못내 아쉬운 지 자기집에서 1달간 같이 지내자고 했다.
엥? 미국을 내가 한달 간?
"야야 우리집에서 밤에 보면 디즈니랜드에서 밤마다 하는 불꽃놀이도 볼 수 있어."
와 ... 디즈니? 불꽃놀이? 근데 내가 딱히 공주님에 빠진 어린애도 아니고 뭐 디즈니랜드 불꽃놀이에 환장할 나이는 아닌데.....
" 근데 나 이번에 한국 들어 오면서 휴가를 많이 써서 니가 들어오면 낮에는 못 놀아 줘 . 낮에는 니가 알아서 돌아다녀야해."
그래? 어쩌지? 음.....그러다 퍼득 원대한 꿈이 생겨났다.
"콜!!!!!"
영어공부가 시급했다.
미국에서 한달 살기로 결정하고 영어과외하는 친구들에게 교재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무작정 부딪쳐서 회화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나 완전 영어문맹이야. 나 패밀리도 스펠링 헷갈려... 뭔 회화?프리 토킹? 미쳤어?"
질겁하는 내게 친구들은 그래야 제대로 배운다고 아예 자신들이 수업하는 필리핀 선생님과 그날 바로 연결을 시켜주었다. (끼리끼리 논다고 내 친구들 추진력도 탱크급이다. 지들은 나때문에 이렇게 변했다고 책임공방하지만...)
아 씨... 영어를 손 놓은지가 몇 십 년인데 갑자기 30분을 프리토킹하라니... 나더라 죽으라는 건가.....
밤 11시에 약속을 잡아놓고 하루종일 안절부절 못했다.
"띠링띠링띠링"
스카이프에서 전화가 울리자 펄쩍 뛸듯이 놀랐다.
"하이" (영어타자로 못 써서 이하는 한글로 쓴다. 이해바란다.)
아름다운 은빛머리에 새까만 피부를 가진 인상 좋은 필리핀 선생님께서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셨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하이" 수줍게 미소를 띠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미나우에요. 나는 60살이에요. 제시카에게 들었어요.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아!!! 요건 알아 들었다!!!
"아 내 이름 ㅇㅇㅇ이에요."
앗샤 할만하네.
"오 그렇군요. 당신은 몇살인가요?"
오 이것도 들린다. 앗샤 ...근데... 50을 영어로 뭐라고 하지?
"아 아 잠깐만 잠깐만 저스트 모먼트"
"오, 노 플라블럼."
미나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기다려 주었다.
"야 막내야 빨리 와 봐 빨리!!!"
"아 ! 왜?"
방금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교복도 못 벗은 막내는 짜증을 내며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야 미나우가 내가 몇살이냐고 묻는데 50을 뭐라고 하더라?"
내가 속살거리듯 묻자
"엄마 53살이잖아. 왜 50이라고 그래?"
"아 씨... 53살이 더 어렵잖아 그냥 50이 뭐냐고????"
"피프티.... 에효"
한숨을 쉰다. 이놈이.... 나가려는 애를 붙잡고 미나우가 안 보이는 곳에 윽박질러서 앉혀놨다.
30분이 3시간 같았다.
미나우가 빠르게 뭐라고 하면 눈짓으로 막내에게 뭐라고 하는지 물어봤다.
"지금 나오는 화면의 내용을 이해하느냐고 묻고 있잖아."
아 그런뜻이야? 오케이 오케이 고개를 마구 끄덕여 주었다. 미나우가 미소 지었다.
미나우는 나랑 통화를 하고 나는 미나우랑 막내랑 셋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굿바이, 좋은 시간 보내고 내일 또 만나요."
미나우의 마지막 인사로 3시간 같던 화상통화가 끝이 났다.
와!! 와!!! 나 외국인이랑 30분 이상 얘기한 거 처음이야.. 흥분해서 막내에게 얘기 했더니
"엄마 대학 나온거 맞아? 어떻게 그걸 못 알아들어?"
"야. 언어라는 게 안 하면 완전 까먹는거야. 나도 너때는 다 알아 들었어. 어 , 그리고 첫날이라 긴장해서 못 알아들은거지 !!"
"내일부터는 나 부르지마. 나도 피곤해. 내일은 절대 안 도와줄거야."
영어 과외비에 몇 백만 원을 쏟아부은 건 생각하지도 않고 저혼자 잘나서 영어를 잘 한다고 생각하는 막내는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제 방으로 가 버렸다.
야 나도 치사해서 너한테 도와 달라고 안 한다. 모르면 파파고한테 물어보면 되지 뭐...
그날부터 미나우가 화면에 한 장씩 띄워준 교재를 가지고 열심히 단어를 찾아 봤다.
vinyl.....vinyl 아 비닐!! 어 근데 이게 영어였어?
오늘 뭐먹었냐고? 김치전을 뭐라고 해야 하지? 미역국을 영어로 스프라고 하면 되나? 사위를 "son in law"
오 법적인 아들이라는 뜻인가? muscle? 아 근육!! 그래서 머슬대회라는 거구나
알아갈수록 재밌고, 알아갈수록 내가 이렇게 무식했나 놀라웠다.
미나우랑 만난 지 3개월
이젠 30분이 모자란다. 미나우의 힘이 크다. 내가 못 알아들으면 천천히 다시 설명해 주신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아예 한국말로 써 주신다. (워낙 한국 사람들을 많이 가르치다보니 기본적인 한글을 조금 아시는듯)
"당신은 시를 시나요? 소설을 쓰나요?"
"poem?" 이게 뭐였더라? 고개를 갸우뚱 거리니 미나우선생님께서 화면에 띄워주신다.
"시"
아.......(미나우는 대한외국인인가)
대한민국의 주입식 교육도 무시 못했다. 억지로 교실에서 앉아 듣던 영어문법들이 새삼스레 기억이 났고, 단어도 조금씩 떠올랐다. 노트 한 권이 빼곡히 영어로 채워지고 발음도 초큼 굴리게 되었다.
그래도 갈길이 구만리이다. 이해력이 달려 수학머리가 없던 내가 그나마 잘하는게 암기라 한 번 본 단어는 까먹어 본 적이 없는데 이젠 3번을 봐도 다음날 보면 얘가 뭐였더라 한참을 본다.
머리 팽팽 돌아갈 때 공부할 걸....
그래도 지금이 좋다. 그 때는 목적 의식도 없고 재미도 없었다. 그 때 나의 영어는 오로지 맞지 않으려고 외우는 무용(쓸모없는)의 단어였다면 지금 나의 영어 공부는 동기도 목적도 너무나 확실해 하루하루 영어 공부를 하는 게 재미있다.
나는 원대한 꿈이 있다. (I have dream)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해서 미국 친구 집으로 한 달간 가서 현지인처럼 살아 볼 거다.
그리고 친구가 일하러 가는 낮에 온 동네를 쏘다니며 미국에 멋진 남자들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 볼 거다. 눈이 옆으로 찢어진 동양의( 언어도 이상하게 하는) 못생긴 아줌마가 부담스러운 누군가는 대충 눈인사만 하고 피해버리겠지만 또 누가 아는가 케이팝의 은혜가 내게도 쏟아져 동양이라는 이국의 나라에서 온 나에게 호기심이 생겨 내게 관심을 가질 지도 ....
그러다가 친해지면 우리는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다음날 만날 약속을 하며 영혼의 울림을 들으면 서로 전화 번호를 교환 할 지도 모르겠다. 같은 한국말을 하는데 서로 못 알아듣는 남편이랑 달리 우리는 언어가 달라도 마음으로 언어를 주고 받을 수도 있겠지. (조르바처럼 춤도 못 추니 열심히 파파고를 돌리거나 손으로 바디 랭귀지를 해야겠지만)메일 주소를 물어보거나 내가 사는 곳에 놀러 오라는 대담한 제안을 할 지도 모르지...
그러면 그도 나도 글로벌한 남사친 여사친을 가지는거다. (제발 현실은 그게 아니라고 정신차리라고 댓글을 달지 말아 주시길 바란다. 이런 낭만주의도 없으면 사는게 너무 슬프지 않은가)
와 와 진짜 생각만 해도 멋지다... 세상은 얼마나 살만한가!!!
같은 한국인이면서 한국말이 안 통하는 남편과 사는 내가 불쌍했는지 신은 내게 500만원이라는 적금도 딱 출국날짜에 맞춰 만들어 주셨다. 이제 떠나면 된다.
그런데... 그런데...
뭐라굽쇼? 백신을 안 맞으면 미국을 들어가지 못한다굽쇼?
친구가 빨리 비행기 티켓을 미리 끊어 놓으라고 해서 여기저기 물어봤더니 백신 증명서가 없으면 못 들어간단다. 헐 헐 헐
친구에게 사정 얘기를 했더니
"오마이갓 오마이갓 너 백신 안 맞았어? 와이? 왜?"
알러지 쇼크로 응급실에 두 번 실려가 죽다 살아난 내가 그 괴담으로 얼룩진 백신을 맞기에는 간덩이가 너무 작았다.
결국 나는 친구가 출국하는 날짜에 같은 비행기표를 끊을 수가 없었다. (그날이 8월 10일 경이었는데 포기하고 친구만 끊고 나는 못 끊었다. 그런데 9월 30일 이후 백신이 풀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 나의 미국 남사친 ....
아직 기회는 있다. 더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고 더 열심히 돈을 모을거다. 그래서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꼭 나의 남사친을 만나러 갈거다. 여권도 다시 갱신했다. 준비 만땅이다.
꼭 기다려요 나의 남사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