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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티나인 Dec 16. 2022

다시, 발레

"발레 하셨죠? "

"아뇨"

"아닌데 하셨던 분인데? 다리가 저렇게 곧을 수가 없는데?"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아닌데 아닌데를 연발하는 선생님의 말씀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따라가기 버거워 구박아닌 구박을 받았던 프리다이빙에서의 자존감이 확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그래 사람은 역시 자기가 잘 하는 거 해야 해.

2년 만에 다시 시작한 발레는 그 사이 10키로를 감량한 몸이라 다리가 더 길어 보였고 선이 아름다워졌다.

몸이 굳어 버려 더이상 바닥에 가슴이 닿지도 않고, 비계를 버리면서 근육까지 버려 한 다리로 지탱하면

비틀거리며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기분은, 마음이  좋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프리다이빙 장비를 주섬주섬 챙기면, 무슨 전쟁에 나가는 사람처럼 비장해졌지만 서랍 깊숙히 묻어 뒀던 발레복을 다시 꺼내면서는 하늘거리는 감촉에 두근거렸다.


내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나빌레라 웹툰보고 철학하기 글에 써 있어서요^^) 내가 발레를 시작한 이유는 '나빌레라'라는 지민 작가의 웹툰에서 나의 덕출씨를 보고 펑펑 울면서 느낀 바가 있어서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1970년 무렵에 나온 일본 만화 '스완'을 보고 발레에 대한 갈망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있었는데  묻었던 갈망을 허겁지겁 땅위로 퍼 올린 게 '나빌레라'였다.

50대가 넘으면서 더이상 미뤄둘 수가 없어 발레 학원에 등록해 다니다가 2년 정도를 한 후 조금 정체기가 왔을 때 친구와 시작한 프리다이빙에 몰두한다고 발레를 잠시 쉬었다.

프리다이빙을 하다가 힘이 너무 없어 근육을 키우라는 강사님의 조언에 헬스장을 3개월 끊어  다니면서 발레는 점점 멀어져갔다.

6개월이 넘어가는데도 진척이 안 보이는 프리다이빙에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같이 간 친구는 덕다이빙도 하고 이퀄도 쉽사리 되어 인어 아가씨의 경지에 오르고 있는데 나는 숨 참기 힘들어 몇 번을 물위로 올라오는 포유동물의 한계에 절감하며 질투와 부러움,자괴감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절절히 맛보고 있었다.

근육을 만들러 간 헬스장은 저렴한 체인점의 방식이라 그런지 젊은 애들이 많았다.

지방에는 인물이 없다고 잘난 애들은 다 서울에 간 줄 알았는데 헬스장에 모두 모여 있었나보다. 내가 오징어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징어는 그렇다치고 기계에 내 몸을 구겨 넣어 억지로 근육을 만들어 내는 방식은 도무지 재미도 흥미도 잘난 동기부여도 가질 수 없었다.

시작도 빛의 속도지만 포기도 빠른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만드는 근육에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한 달만에 그만두었다. 3개월치의 수강료가 아깝기도 했지만 기회비용이라 생각하고 가뿐한 마음으로 정리했다.

프리다이빙은 아직 내년 5월까지는 기회가 있어 날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다시 도전할 생각이다.(드디어 이퀄이 됐다.!!!) 하지만 5월이 지나고도 더 진전이 없으면 정리할 생각이다.

친구는 자격증에 도전 해 본다고 했다. 나는 5월이 되면 그만두겠다고 했다.  친구는 아깝지 않느냐고 이룬게 없지 않느냐고 했다. 하다가 중도에 그만 두는 나의 끈기없음에 대한 무언의 질책도 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어쩜 그렇게 겁 없이 뭐든 시작부터 하세요? 저는 생각이 많은데.."

사람들이 내게 갖은 대부분의 반응은 이렇다. (여기에는 양가적 감정이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넌 뭘 그렇게 잘 저지르니 끝까지 할 자신은 있니? 부러움반, 책망반)

심지어 머나먼 나라 내 필리핀 영어 선생님께서도

  "쉬나, 넌 어메이징이야. 난 네가 존경스러워." 라고 하신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안 해보고 어떻게 아냐? 왜 중간에 그만두는 걸 다들 부끄러워 하고 무책임 하다고 생각하지? "

성과주의 사회에 살아 그런지 우리는 결과물이 버젓이 나오지 않거나 포기한 것에 대해 묘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사회성이 결여되고 상식이 많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나는 그런 면에서 사고가 좀 자유로운지 결과물이나 끝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용기가 많다기보다는 시선에서 좀 편한건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하다가 그만 두면 왜 낭비라고 생각하는가?

남는 게 왜 없겠는가? 비록 자격증까지는 딸 수 없겠지만 이퀄이라는 것도 해 보고, 5미터 수심에도 들어가 보고, 죽을 것 같아 다시 수영장에 가서 열심히 자유수영도 하게 됐는데....

역시 헬스장은 나와 맞지 않다는 걸 완전히 이해했고, 3개월이라는 가성비에 속지 말자는 경제관념도 생겨났는데...


무튼, 돌아 온 탕자처럼 발레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을 때 연금술사의 표지처럼 집 앞에 발레 학원이 생겼드랬다. 차타고 옆 동네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해야 몸이 풀리는 걸 알았지만 바이올린에 영어수업료에 더 큰 지출을 할 수가 없어 우선은 일주일에 한 번만 하기로 했다. (내가 나를 위해 투자하는 마지노선은 30만원이다. 막내는 영수에 100만원을 쓰지만 당당한데 나는 내가 벌어 쓰는데 30만원을 넘으면 안절부절 못 한다. 부모된 죄다.)


"어마나!!!! 너무 예뻐요. 몸이 발레 선생님 같아요. 그 왜 있잖아요. 러시아에 가면...."

텐션이 남다른 발레 선생님은 목소리도 꾀꼬리고 립서비스도 우주급이셨다. 그래도 무슨 러시아까지....좀 쑥스럽네...

"그 왜 있잖아요. 러시아 가면 머리 틀어 올리고 주름 자글자글한  할머니 발레 선생님 진짜 많거든요.. 00님께서 딱 그런 느낌이세요... 오호호호"

칭찬인가 멕이는 건가??????


오랜만에 안 쓰던 근육을 다 썼더니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살이 빠지면서 코어근육도 너무 약해졌다. 근육통이 심해 알약을 한 개 삼키고 끙끙거리며 잤다.

뭐든 조금이라도 젊을 때....... 최고의 발레는 몸이라는 안무가 베자르는 틀렸다.

  몸이 아름답지 않고 살도 내 두 배에 육박하는 젊은 아이들은 한 다리로도 거뜬히 서 있었고 띵띵해도 예쁘고 귀여웠다. 나이가 깡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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