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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국제영화제에 가다

by 권영순

ktx를 처음 탔다. 은퇴를 하니 기차를 타고 어디를 갈 이유가 더 없었다.

그동안 내게 전주는 지나가는 장소에 가까웠다. 수학여행으로 학생들을 인솔해 들른 적은 몇 번 있다. 경기전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수학여행은 5월이라 땡볕이다. 차에서 내리기 싫어하는 학생들을 재촉해 여기까지 왔으니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보고 가자며 잔소리를 한 기억이 전주에 대한 추억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작은 아들은 전주 국제영화제와 인연이 깊다. 20회 대상 수상작인 <흩어진 밤>을 촬영한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단편 영화로 초청되었다. 영화제 측에서 숙소를 넉넉하게 잡아 준 덕분에 영화도 보고 하루 묵을 수 있었다. 간만에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눈치를 주는 까미를 내팽개치고 전주까지 그야말로 달려갔다.

http://www.youtube.com/watch?v=YmJkvjVsimU

<한낮의 침입자=Beyond the Veil>의 한 장면

2시 조금 넘어 전주역에 도착. 택시를 타고 아들이 알려준 숙소로 찾아갔다. 택시 기사님은 호텔 이름을 왜 그렇게 어렵게 지었냐며 한 소리 하신다. 사실 영어보다 우리말에 익숙한 나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작은 아들을 프런트에서 만나 키를 받아 짐을 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전주 투어에 나섰다.

숙소는 아주 정갈했다. 이름이 좀 거창하게 느껴지긴 했으나.

전주까지 왔으니 대표 음식 하나는 먹방을 찍어줘야 한다며 영화의 거리 순례를 뒤로 돌렸다. 전주 콩나물 국밥집을 찾아 남부시장으로 갔다. 그러나??? 새벽 여섯 시에 문을 열고 두 시에 문을 닫는단다. 두리번거리다 눈에 뜨이는 곳에 피순대 집이 있어 들어갔다.

점심이 늦어져서이기도 했지만 정말 맛이 좋았다. 그득한 배를 안고 한옥마을 쪽으로 걸었다. 전동성당은 보수 공사 중인 모양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산들은 야트막하면서도 부드러운 능선이라 보기 좋았다.

신록들이 뿜어내는 녹색 향기가 산들바람에 섞여 내게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피천득의 시 '오월'이 저절로 떠올랐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전주는 깨끗하고 여유로운 도시였다. 바람조차도 눈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건물들이 어지럽게 높거나 불안정하게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인상적이었다. 도시가 이렇게 소박하고 정갈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경기전이 보이는 카페를 찾아들었다. 평일이라 손님이 한 분 밖에 없다. 여유롭게 천천히 주변 풍경을 보며 차를 마셨다.

멀리 전동성당이 보이는 카페에서 오롯이 전주를 느낄 수 있었다.
단편 경쟁 영화가 상영된 전주 CGV 입구
전주 영화의 거리 입구

아들의 단편영화는 5월 1과 3일 전주 cgv에서 상영되었다. 상영 후 감독 출연배우와 관객과의 대화도 있단다. 나는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아들의 영화를 보러 전주까지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화의 거리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영화제 분위기가 달아오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cgv 앞에서 아들에게 표를 받고 영화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영화 시작은 8시 30분. 10분 전까지 인근 돔 영화관과 영화의 거리를 구경했다. 늦지 않게 영화관으로 갔다. 상영관이 크지는 않아도 객석은 가득 찼다. 거기서 초청된 4개의 단편영화가 상영되었다. 짧지만 임팩트 있는 영화들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봤다.

영화 평론가와 함께 진행한 감독과 배우들의 질의응답 시간인 관객과의 만남도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작은 아들의 답변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찍었다.

즐거운 나의 집을 영화에 삽입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김진형 감독

객석에 앉아 아들의 답변 모습을 보니 그동안 있었던 여러 일들이 필름처럼 흘러갔다.

연극영화과를 지원하겠다는 아들과의 대화가 스쳐갔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한다더니 굶어 죽기 딱 좋은 연극영화과를 가냐.’며 나는 말렸었다. 하지만 그렁거리는 눈으로 그 과를 꼭 가고 싶다는 말에 바로 꼬리를 내려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권하는 내게 '영화를 만들며 살고 싶다.'라고 단호히 말하던 모습도 지나갔다. 사실은 영화인으로 살아갈 뜻을 꺽지 않을 걸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알고 있었다. 이미 촬영 현장이 막노동보다 노동 강도가 더 세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뜻을 꺾을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영국으로 찾아간 내게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이 영화'고 그 일이 적성에 딱 맞아 다행이라며 상기된 얼굴로 웃는 아들을 향해 부모로서 평범한 삶을 제시해 주는 걸 오래전에 포기했음도 알았다. 학비 마련이 어려워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올 때도 영국에서 아르바이트 한 돈을 모아 단편영화를 찍어 돌아온 녀석이었다.

고교시절까지 아들은 김밥과 햄버거를 참 좋아했다. 대학을 마칠 무렵 김밥이나 햄버거를 먹기 싫다고 하기에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이유를 듣고 할 말을 잃었다.

아들은 4년간 한 해 두 편씩 단편영화를 찍었다. 영화과 학생들은 모두 그렇게 훈련했다. 배우도 감독도 스태프도 모두 같은 과 학생들이었다. 아무리 단편영화에 품앗이라도 기본적으로 드는 비용이 있다. 팀의 식사비, 장소 섭외와 이동, 배우들의 의상 및 소품, 장소 섭외비 그리고 학교에서 빌릴 수 없는 기자재 대여 비용들이다. 그 외에도 자잘한 비용들이 그야말로 정신없이 들어간다. 그렇게 영화를 찍다 보면 밥은 가장 싸고 편한 김밥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 비용만도 부담이 될 정도로 만만치 않았을 터.

매 학기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는 데도 집에서는 영화를 만드는 데 장학금을 쓰라고 허락해 줄 수밖에 없었다. 대학시절 내내 촬영이나 스태프 알바를 쉬지 않고 했는 데도 말이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때 함께 했던 팀원들은 지금도 같이 영화를 만들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힘들지만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아들의 동기이자 동료들이 힘을 내기를! 그들의 열정과 노력이 정당한 대가로 돌아오기를~

그런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오늘 한국의 영화가 세계에서 우뚝 설 수 있다는 걸 나 같은 사람도 알고 있으니.....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영화관을 올려다보며 아들이 이렇게 말한다.

'다음에는 장편 가지고 여기 와야 하는데~'

국제 영화제에 초청받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며 아들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생활비와 영화 찍을 비용 마련을 위해 밤샘 촬영으로 파김치처럼 지쳐 돌아오는 날들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그런 고된 삶을 살지 않고도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경제적인 후원을 해 주지 못하는 부모들 마음도 쓰라리다는 걸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아들의 꿈도 이룰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아들이 쓴 영화 대사에

- 재능이란 보통 베일에 쌓여 있지. -

자신이 원해 영화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재능이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했을 아들이 베일에 싸인 재능을 활짝활짝 열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돌아오는 ktx에서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들을 보며 내내 마음속으로 이런 기원을 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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