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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양이가 사는 법

by 권영순

들수국이 진다. 바람이 불지 않는 데도 하얀 꽃들이 뭉텅이로 바닥에 떨어진다. 꽃이 피고 지는 순간이 너무 짧다. 들수국에서 눈길을 떼어낸다. 작년 아로 새끼들을 이 나무 아래 묻어준 게 생각 나서다. 너무 빨리 생을 마친 녀석들이 생각나 올해 들수국이 유별나게 탐스럽다는 생각을 애써 털어버렸다.

들수국 나무

지난 3일 동안 아롱이를 불러대며 박물관 주변을 몇 번 돌았나?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는다. 나를 못 만난 다음 날은 이른 아침부터 박물관 정산소 앞 기둥에 와 기다리던 녀석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아롱이를 불러대자 대신 나오는 녀석들에게 계속 물어봤다.

"아롱이 못 봤니?"

작은 아들에게 입양되고 남은 나리 자매들. 이제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고양이에게 물어봐야 대답이 '야옹~'밖에 없을 걸 나도 안다. 그래도 아롱이에게 전해줄 거 같아 말을 붙여 가며 먹이를 준다. 그렇게 고등어, 턱시도, 삼색이들에게 물어보며 다녔다. 모두 대답이 없다. 공원에 남은 아롱이 두 번째 새끼들에게도 물었다.

"네 엄마 아롱이 어디 있니? 엄마 만나면 내가 찾는다고 밥 먹으러 나오라고 알려줘."

새싹들이 올라오던 초봄에도 아롱이의 건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 너무 힘들었나 싶었다. 하긴 지난겨울이 좀 추웠어야지.

은토끼님은 '아롱이가 곧 죽을 거 같아요.'라고 하셨다. 하지만 아롱이는 고양이 하피스 한 번 걸리지 않고 잘 버텼다. 내가 찾으러 다니면 하늘정원 꼭대기 레스토랑 주변이나 주차장 출입구 기둥, 박물관 뒤 조릿대나 맥문동 사이에서 짠~하고 나왔다. 박물관 주변이 아롱이 영역이었다.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롱이가 요즘 지내는 곳으로 추정되는 하늘 정원에서 내려다본 저녁 풍경.
아이들 밥자리에 요즘 이 녀석이 나와 나랑 신경전을 벌인다. 일 년 정도 된 어린 녀석이다. 아롱이가 쫒겨다닐까 걱정된다.

아롱이는 다른 공원 냥이들과 달리 처음 만났을 때부터 습식사료를 먹였다. 지금도 아주 배가 고프지 않으면 건사료를 먹지 않는다. 아롱이가 잘 먹는 밥을 사는 건 나나 은토끼님이 지난 4년 간 늘 해 온 일이다. 어쩌면 녀석의 입맛에 맞는 걸 준비해 조공하는 호구가 바로 나였다. 녀석 새끼들에게도 잘 먹는 습식을 조공한다. 지적질을 잘하는 작은 아들 말대로 호구 맞다. 조공의 종류가 여타 공원 냥이들과 달라서인지 어디 멀리 가지도 않았다. 하루도 굶기지 않고 급식을 하니 나라도 어디 갈 생각은 하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우리 집에 오는 택배의 절반 가량은 공원 냥이들을 위한 물품이다. 그런 물품을 볼 때 아주 가끔이지만 가족들의 눈초리가 신경 쓰일 때가 있다. 남편은 너무 지나치니 어느 정도 선을 긋고 하라고 충고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다.

"까미 엄마랑 동생들 밥 굶겨???"

가족들은 그 한 마디에 더 이상 잔소리를 못한다. 입에 자물쇠를 채우게 만드는 일종의 비밀번호다. 가족들의 불만을 일거에 진압하는 한 마디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원 냥이들 밥을 주러 다니는 것에도 부연 설명이 필요 없다. 산책을 갔다 아롱이가 어떻게 구는지 직접 봤기 때문이다.

아롱이는 유난히 귀엽게 생겼다. 성격은 까칠 냥이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게 있다. 어미로서 아롱이가 보여주는 행동이다. 고양이가 이기적이라는 편견을 아롱이와 새끼들 때문에 버렸다.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더 정을 들이게 된 것 같다. 아롱이는 조공 시간이 늦어 아무리 배가 고파도 새끼들에게 먹이를 양보한다. 물론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도 자꾸 빼앗을 때는 냥 펀치를 날리기도 한다. 그럴 때 나도 모르게 하는 말이 있다.

'그래. 자식 교육 차원에서 가끔 혼도 내야지???'

새끼들을 독립시키는 데도 분명한 원칙이 있는 것 같다. 적어도 6개월이 지난 듯하면 안정적인 밥자리를 새끼들에게 양보한다. 양보한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아롱이 덕분에 내 가방에는 항상 녀석에게 바칠 먹이와 간식, 일회용 밥그릇이 들어 있다. 공원을 나갈 때 필수품이다.

먹이에 사람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잠자리나 새끼를 낳은 장소는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아무리 추워도 편한 곳을 찾지 않는 것도 녀석의 특징이다. 좋은 집을 가져다 핫팩을 넣어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권해도 소용이 없다. 어디선가 오롯이 강추위를 견딘다.

자연을 이용한 은신술도 뛰어나다. 삼색이의 알록달록한 무늬는 초화의 덤불과 비슷하다. 그곳에 녀석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일어나 나를 불러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 또한 놀라울 정도다. 여왕의 도도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 먹이를 다른 냥이들이 가로채도 화내지 않고 양보한다. 어떤 때는 아롱이 특별식을 가로채는 녀석들이 얄미워 내가 대신 화를 낼 때가 있다. 째려보며 뭐라고 해도 아롱이는 의연하다.

이리저리 혈연으로 얽혔으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든다. 4년 간 녀석을 돌보며 나도 모르게 알게 된 사실이다.

아롱이를 만나지 못한 3일 차 저녁에는 밥을 먹자마자 집을 나섰다. 하늘 정원 꼭대기까지 올라가 아롱이를 불렀다. 분명 배가 고플 텐데. 해가 뉘엿거리니 도시의 불이 켜진다. 야경이 시작되는 시간. 어디 아픈 건지? 아니면 어느 구석에서 숨을 거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다시 찾으러 나왔으나 허탕이다. 역시 안 나온다. 발길을 돌리는데 마음이 무겁다.


다음 날 . 오늘부터는 은토끼님이 애들 밥을 먹이신다. 사흘간 아롱이가 나오지 않았다고 알려 드렸다. 거리가 좀 먼데도 박물관 주변을 거쳐 공원역으로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그런데 아롱이가 맥문동 더미에서 불쑥 나오며 야옹거린다. 몸이 무거워 보인다.

“ 야! 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먹이와 밥그릇을 가방에서 서둘러 꺼낸다. 잔소리가 많아진다. 원망이 섞여 있다. 하지만 나와줘서 고맙다. 밥을 챙기며 오늘부터는 여기로 오지 말고 원래 밥 먹던 곳으로 가라고 일러둔다. 내일부터 바쁘면 여기 못 지나갈 수도 있으니 꼭 밥 먹으러 가라고. 어느 정도 밥 먹는 걸 지켜보며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를 듣는 농부의 기분을, 아이들 입에 맛난 음식이 들어가는 엄마의 마음을 나도 모르게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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