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의 꽃말은 진심

by 권영순

비 오는 날. 수채화 속 풍경을 걸었다.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가 녹음의 초록초록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 손에는 짙초록 수국 한 송이가 색깔 좋은 포장지로 예쁘게 싸인 채 들려있다.

선생님이 선물해 주신 수국 한 송이

비 오는 날이어선지 마음이 푹 가라앉은 채 약속 장소로 나갔는데 선물 받은 수국 한 송이에 기분이 한없이 밝아진다. 나에게 종종 꽃을 선물해 주시는 선생님 덕분이다. 올림픽 성화 주변 평화의 광장을 지나오시는 선생님 손에 들린 꽃을 카페에서 보는 순간 마음은 이미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진심 어린 행복을 선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끼풀꽃 속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는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말해 주는 게 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즐비한 행복을 두고 굳이 행운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안타까와서다.

차를 대충 마시고 비에 젖어 싱싱한 녹색을 뿜어내는 수변 길을 걷다 토성으로 올라오니 자귀나무에 연분홍 고운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오락가락하는 빗 속에서 자귀나무 꽃이 너무 싱그럽고 고와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내가 아는 자귀나무의 의미는 자손이 귀하게 되는 나무, 부부 금슬이 좋아지는 나무다. 꽃말은 환희. 금슬 좋은 부부에게서 나고 자란 아이니 당연히 귀한 사람일 터. 오늘따라 자귀나무 꽃이 더 곱게 느껴지는 이유는 좋은 사람과 보내는 시간 때문일 것이다.

비에 젖은 자귀나무 꽃이 화사한 불꽃놀이 모양으로 피어있다

그 해 나는 담임과 부장을 겸해 수업 부담을 덜게 되었다. 주 1회 4시간을 맡아주러 오셨던 강사 선생님이 바로 오늘 만나는 분이다. 중학교 1학년. 아직 초딩 티를 벗지 못해 천방지축이라 수업 분위기를 잡는 밀당도 잘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면접을 보며 살짝 걱정이 되었다. 체격이 여리여리하고 갓 대학교를 졸업하신 티를 못 벗어 애기같은 분위기를 풍겨서였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음이 곧 밝혀졌다.

어느 날이었다. 수업 중 교실 복도를 지나가는 일은 수업 분위기를 산만하게 만들기 때문에 조심한다. 무슨 일 때문인지 그날 선생님이 수업을 하시는 복도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30년 경력의 나도 어려운 진지하고 협조적인 수업을 슬쩍 구경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계시는 반은 다소 산만한 학생들이 여럿 있어 수업 분위기를 잡기 힘든 반이었다. 그런데!!! 녀석들이 반듯한 자세로 앉아 복도의 기척에도 교사의 말에 집중집중하고 있었다. 심지어 필기까지? 필기 습관을 들이려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 데도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장난기 자글자글한 눈들은 그대론데?

그 작고 여리한 체격 어디에서 말썽쟁이들을 단번에 압도하는 성량 좋은 목소리와 카리스마가 뿜어지는지.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수업 시연을 보고 평가를 했다면 당연히 만 점을 드렸을 포스였다. 더구나 수업 내용은 문법 중에서도 몸이 비틀릴 정도로 지루한 음운 현상에 대한 설명이었다. 듣기만 해도 머리가 띵해지는 수업을 과몰입하며 듣고 있는 꾸러기들이 그날따라 어찌나 귀엽던지. 수업만 끝나면 책상 위를 날아다니며 목소리의 볼륨을 최대치로 경신할 녀석들임을 잘 알고 있어 더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학교에는 이런 선생님이 많이 필요한데. 어쩌다 시기를 잘못 만나 책임감도 실력도 충분한 예비교사들의 정규교사 진입이 이렇게 어려워졌는지. 그 선생님의 수업을 보며 안타깝고 아쉬웠다.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내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서도 그리고 은퇴를 하고 나서도 가끔 선생님은 꽃을 한 다발씩 들고 나를 찾아주셨다. 포장도 직접 하셔서 더 돋보이는 고운 꽃은 선생님을 꼭 닮은 모습으로 내게 전해졌다.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먼길을 오셔야만 전해지는 고맙고 미안하고 나를 완전한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꽃다발.

오늘 받은 수국의 꽃말은 진심. 오늘 본 자귀나무 꽃말은 환희! 진심이 환희를 선물하는 시간을 보냈다.

비 오는 날. 얼마 전 보복 운전을 당해 힘들었던 이야기. 만나지 못했던 시간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나누며 선생님과 산뜻하고 충만한 기분으로 공원을 산책했다.

오늘은 행복을 전해주는 선생님 덕분에 기운이 나는 날이다. 선생님도 나와 같이 싱싱하고 행복한 기운을 한껏 받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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