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냥이들 밥을 챙겨 집을 나서기가 무섭다. 겨울나기도 힘들지만 여름도 마찬가지다. 집냥이가 된 까미마저도 요즘은 움직임이 적다. 툭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겨울에는 내 옆에 잘만 붙어 자더니 요즘은 오라고 해도 귀찮은 표정이다. 내가 집을 나설 때마다 눈치를 주더니 이즈음은 그것도 귀찮은지 뻔히 보다가 고개를 숙여버린다. 선인장 인형을 죽부인처럼 안고 눈을 감아버리면 나도 모르게 약간 서운하다. 죽부인에 밀려난 본부인의 열받는 심사가 슬쩍 생긴다고나 할까.
"까미야. 아롱이 엄마랑 동생들 밥 좀 주고 올게."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해도 들은 척 만 척이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계단을 통해 더운 바람이 훅하고 끼친다. 그래도 애들이 밥을 기다리니 안 갈 수도 없다. 종일 낙이라고는 밥 주러 오는 사람 기다리는 게 일인데. 지난밤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꽤 내렸다. 밤을 이겨내고 잘 있을지 슬쩍 걱정이 된다.
까만 비닐봉지에 냥이들 캔 사료와 건사료 거기 물까지 한 병 들고 나서자니 제법 무게가 만만치 않다.
은토끼님은 발목을 다치셨다. 고등어가 자주 나오는 곳은 경사가 급한 비탈이다. 비 오는 날 그 비탈에서 미끄러지셨다. 결국 인대와 연골을 다쳐 재건술까지 하셨다. 어쩔 수없이 9월 초까지 병가를 내셨다. 상처는 겨울보다 여름이 훨씬 더디게 아무는데. 잘못하면 덧나기도 쉽다.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은토끼님은 본인 발목보다 공원 냥이들 걱정이 더 태산이신 거 같다. 다행히 인근 주민 한 분이 선뜻 도움을 주신다고 하셔서 걱정을 덜고 있다.
박물관 앞 건널목 신호등 앞에 섰다. 밝은 황톳빛 박물관의 고풍스러운 건물을 비껴 내 눈길은 다른 걸 더듬는다. 출입구 주차장 정산소 근처에 고등어가 나와 기다리고 있는지 나도 모르게 살피는 것이다. 시력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닌데. 습관이다.
녀석은 어미 고양이다. 닭가슴살을 주면 입에 물고 사라졌다 돌아온다. 할 수없이 통째로 준다. 평소에는 작은 조각으로 나눠 주던 거다. 태어나 일 년도 안돼 엄마가 되어 사는 삶에 대해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고 나를 납득시킨다. 그냥 까미는 삼촌이 나리는 이모가 되었다는 거 정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삼촌과 이모가 되다니. 거기다 평생 마주칠 일이 없다. 살짝 그 입장을 생각하니 서글픈 생각이 든다. 전혀 모르는 타인으로 살아가는 가족들처럼.
고등어는 키 작은 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다 나온다. 아르렁대며 경계가 심하다. 그러나 눈에는 반가움 가득이다. 밥을 봐서인지 철쭉 나뭇가지 사이로 새끼들이 어른대는 게 보인다. 고등어가 나름 교육을 철저히 시킨 모양새다. 그래! 사람들과 개에 대한 경계는 잘 배워둬야지.
어제는 건사료 통에 '신기패'를 그어줬다. 여름에는 건사료 통에 개미가 장난 아니게 꼬인다. 이 고민은 긴 시간 공원 냥이들을 돌본 집사님이 알려주셔서 해결했다. 내 고민을 듣자마자 사진을 보내주셔서 당장 구입해 사용했다.
건사료는 고양이들만 먹는 게 아니다. 한 시간도 안돼 사료통이 텅 빈다. 비둘기, 까치, 참새 심지어는 직박구리까지 노린다. 처음에는 금방 비어버리는 통 때문에 '어? 잘 먹는다.' 싶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공원에는 고양이를 무서워하기는커녕 개무시하는 까치와 비둘기가 잔뜩 살고 있다.
그나마 건사료가 남아 있다면 그 통속에 개미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들어가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 통째로 다 쏟아 버리고 새 사료를 부어놔야 한다. 이게 다 돈인데 싶어도 할 수 없다.
한 군데밖에 안 갔는데. 벌써 얼굴에 땀이 쏟아진다. 일부러 목에 두르고 온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는다. 안경을 벗고 땀을 닦아야 한다. 눈에 들어가면 침침하고 앞이 잘 안 보인다. 물병과 짐을 바닥에 놓고 땀을 닦고 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분과 눈이 마주친다. 빙긋 웃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그거 잘하는 거 아니라며 잔소리에 더해 시비를 걸까 살짝 겁이 나서다.
점박이는 최근 사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좋은 이름이라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아로의 죽음 이후 다시는 공원 냥이들 이름을 짓지 않으려고 했더니 결국 다른 분이 지어주셨다. 그렇게 점박이는 사랑이가 되었다. 하늘공원의 오르막을 올라오는 나를 보자 사랑이가 먼저 뛰어온다. 사랑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묻는 말이 있다.
'엄마 어딨어?'
퇴근해 집에 돌아온 남편이 자식들에게 묻는 질문 같아 피식 웃음이 난다. 눈은 아롱이를 끊임없이 찾는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아롱이의 알록달록하고 작은 몸체가 슬그머니 나타나더니 다리에 감긴다. 근래 들어 아롱이의 이런 애정 표현이 잦아진 느낌이다. 그래도 자리에 있다 밥을 먹으러 나와 줘 고맙다. 이렇게 더운 날은 찾으러 다니지 않는 것만도 행운이다.
뙤약볕을 피하려 들고 있던 양산을 내려놓고 부지런히 둘의 먹거리를 꺼낸다. 먼저 사랑이의 연어 파우치와 캔을 따 그릇에 부어준다. 한 번에 두 개를 줘야 제 엄마 아롱이 밥에 덤비지 않는다. 사랑이는 제 언니 아로처럼 연어를 좋아한다. 작년에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아로의 예쁜 얼굴이 사랑이에게도 엿보인다.
다리 사이를 서성대며 기다리는 아롱이에게 얼른 닭가슴살 트릿과 스낵을 부어준다. 아롱이는 닭가슴살 트릿을 너무 좋아한다. 어쩌다 그걸 잊고 나가면 팔을 잡아당긴다. 발톱이 옷에 걸려 난감해하는 아롱이 표정은 압권이다. 아롱이를 돌보던 초기엔 손등에 피도 많이 봤다. 잠시만 방심하면 여지없이 할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순해졌다. 툭툭 치는 정도랄까.
캔을 더 부어주고 건사료와 물을 챙겼다. 어제 신기패를 그어줬는 데도 개미가 들어가 있어 여러 군데 더 그어주었다. 은토끼님 다쳐서 못 오시니 기다리지 말라고 아롱이 눈을 보며 말한다. 내일 아침에 오겠다며 짐을 주섬주섬 챙겨 일어났다. 하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저녁에 또 올 걸 나도 안다. 이렇게 마음 약한 내가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아롱이는 내가 쳐다보면 따라오라는 소리인 줄 안다. 밥을 먹다가도 따라나선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어쩌다 보니 공원 고양이들 식성만이 아니라 몸짓이나 눈빛까지 알게 되다니!
세 번째 장소 피에로 조각상으로 발길을 옮긴다. 밥 짐이 제법 가벼워져 있다. 요즘 귀요미 성적이 좋기는 하지만 혹시 안 보일까 봐 걱정이 된다. 귀요미와 다롱이가 있는 길목을 들어서자마자 눈치가 천 단인 고양이가 달려온다. 다롱이다. 아주 발에 채인다. 서둘러 닭가슴살을 하나 꺼내 녀석의 입에 물린다. 거기에 정신이 팔렸을 때 귀요미 밥을 챙겨 얼른 주고 와야 한다.
고양이 건사료 통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조류들. 비둘기, 까치, 심지어는 고고하신 직박구리에 이름도 잘 모르겠는 녀석들까지 대놓고 밥을 기다린다. 주변을 얼쩡거리는 일련의 무리들이 오늘도 장난 아니다.
냥이들 7마리 걷어 먹이는 데 내가 사는 건사료만 해도 한 달에 10킬로. 은토끼님이 얼마나 사시는지 알 수 없으니 주변 조류들을 우리가 거의 먹여 살리는 느낌이다. 자식들~. 천적인 벌레나 잡지. 왜 고양이 사료를???
억새풀 사이 우거진 곳에 숨겨둬도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아마 코의 기능이 엄청 발달한 모양이다. 역시 건사료 통 두 개가 텅 비어 있다. 비둘기와 까치들은 대놓고 주변을 서성댄다. 억새풀 숲에 귀요미 밥을 주고 건사료 통을 꺼내 닦는다. 다행히 개미는 안 꼬였다. 하지만 건사료 통을 두는 곳에도 지뢰가 있다. 공원 모기들이다. 긴바지에 긴팔을 입어도 소용없다. 청바지도 뚫고 물어댄다. 역시 몇 군데 물려 여기저기 가렵다.
그래도 오늘 미션은 완료.
다롱이와 귀요미가 먹는 걸 살피고 근처 벤치에 잠시 앉아 쉰다. 숨겨둔 건사료 통을 못 찾은 건지 비둘기 몇 마리가 내 주변을 빙빙 돈다. 갑자기 다 살기 위해 태어났는데 넌 비둘기니 먹지 말라는 내 얍삽함이 민망해진다.
너무 덥다. 음료수라도 한 잔 뽑아 마셔야겠다. 은토끼님이 안 계시니 저녁에 한 번 더 나와 살펴야겠다. 며칠 전 심란한 일이 생겨 저녁에 오지 않았더니 다음 날 아침 아롱이와 사랑이가 제법 멀리 도로 근처까지 나와 기다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었다. 늘 자기들을 챙기던 은토끼님이 안 보이니 냥이들이 불안 불안한 모양이다 싶어서다.
힘들어도 더워도 그냥 냥이들 밥을 주러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