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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Dec 03. 2022

김장, 그 험난한 여정

 집집마다 김장으로 인한 에피소드가 많은 이유를 나는 안다. 즐겁게 하려 해도 힘이 드니 에피소드도 다수 생산되는 게 아닐까?

 

 올해 김장을 화성에서 하게 된 데는 나의 실수가 있다. 아버지가 계셨던 화성 청요리는 태행산 끝자락에 있다. 지난 추석, 천안 공원묘원으로 부모님 성묘를 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작은 오빠가 상주하고 있는 창고형 주택 옆에 배추가 심겨 있기에 지나가는 말로 김장 배추로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배추들이 너무 청정했다. 태행산 맑은 기운이 듬뿍 담겨 있어 보였다. 내 느낌이지만 정성을 많이 들여 기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해 볼게."  

 사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말을 거의 잊은 상태였다. 작년에는 강원도 고랭지 절임배추를 주문해 김장을 했었다. 결과는 완전 실패. 김치가 써서 아직도 일부를 보관 중이다. 무엇이 원인인지 알 수 없지만 각종 양념이 든 게 아까워 쓴맛이 나는 김장 김치를 먹어야 했다.

 내가 김장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남편이 '나는 김치만 있으면 밥을 먹는 사람이다.' 이 주장을 결코 접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맛집으로 소문났어도 김치가 입에 맞지 않다면 평가가 박하다. 어디 가서 점심이 맛있었다면 그 집 김치가 자신의 입에 맞았다는 뜻이라고 해석될 정도다. 물론 말의 말미에 꼭 붙이는 소리가 있다.

 '그래도 우리 집 김치가 제일 맛있다.'는.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이 내가 김치를 굳이 집에서 하는 이유는 아니다. 우리 집에서 소비되는 김치를 사 먹기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다. 그만큼 대량의 김치가 필요하다.

 남편을 김치 마니아로 만든 건 우리 엄마시다. 엄마는 먹성이 센 아들 넷을 키우셨다. 부엌에 들어가시면 뭔가 뚝딱 만들어 내 우리를 먹이셨다. 거기에 종가 맏며느리로 부족하지 않은 음식 솜씨를 가지셨다. 특히 김치와 각종 장류의 맛은 특별했다. 음식도 잘하셨지만 손도 크셨다.

 그런 엄마의 고명딸이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내게 김장은 대행사였다. 배추 몇 백 포기 정도는 너끈하게 김장을 하시던 오랜 습관 덕분에 나는 결혼을 해서도 보조 역할을 꽤 긴 시간 했다.

  오 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구포리 산으로 귀향하신 다음부터는 무와 배추를 직접 기르셨다. 연로하셔서 그것들을 거둬들이기도 힘들다고 느끼시기 전부터  김장 일의 많은 부분을 누가 했을까? 남편이 했다. 형제들이 지방이나 외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조차도 가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 남편은 무와 배추를 거둬들여 손질해 절이고 절인 배추를 한 번 뒤집어 놓고 집으로 돌아와 나를 데려가야 했다. 김장철이 고교 입시철과 비슷한 시기여서다. 학생들 원서는 물론 자소서와 각종 추천서를 쓰고 면담하는 일정과 겹치는 시기라 주말에도 출근해 그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추가 근무 수당도 없던 시절이다. 하지만 주말까지 업무를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야 했으니 김장 노역에서 일부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의 빈자리를 남편이 채우다 보니 배추 절이기부터 심지어 속을 넣는 일에 남편이 나보다 더 숙련된 일꾼이 될 수밖에. 

 이런 연유 덕에 내가 배추 절이기를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내 일이 아니라 남편 일이었으니까. 겨우 20포기! 숙련된 남편이 할 테니 큰 문제가 없을 거라 가볍게 생각했다.


 작은 오빠는 배추는 물론 무도 준비해 뒀으니 주말에 와서 김장을 하라고 전했다. 아직 날이 포근하니 야외에서 일을 해도 어려움은 없을 거라며. 그 연락을 받은 다음부터 나는 정말 바빠졌다. 젓갈류를 사고 황태와 다시마 표고버섯 등을 사 기본 양념거리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연락을 받은 주 금요일. 일을 하러 간 남편 대신 막내 동생을 불러 각종 짐을 싣고 우리의 배추가 있는 화성 청요리로 출발했다. 물론 김치를 나눠주겠다는 미끼가 있었다.

배추가 자란 밭. 보이는 산이 태행산이다. 고라니들이 내려와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거둬들이고 남은 배추는 밭에 방치되어 있다. 판매가 애매한 배추라지만 힘들여 기른 정성을 알아서인지 너무 아까웠다.

  막내는 내가 싣고 가는 김장 용품들을 보더니 이런 소리를 한다.

 "이사 가?"

 그만큼 양이 만만치 않았다. 커다란 함지가 3개에다 김치 냉장고용 통이 6개. 기타 각종 양념거리를 실어야 했으니 그런 소리를 듣고도 남긴 했다. 배추 20포기 김장용이라고 보기에 나도 좀 의아하긴 했다.

 그러나 사전 준비도 만만치 않았다. 전날만 해도 홍갖과 깐쪽파와 양파를 사다 손질해 김치통 하나를 채웠다. 김장에 필요한 부재료가 어디 한 두 가지인가? 메모까지 해 가며 이것저것 준비를 했는 데도 혹여나 빠진 것이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전직 담임 경력 30년이면 꼼꼼 여왕 소리를 들어도 부족하지 않은 메모 실력을 발휘했는 데도 말이다.

 금요일 오전인데도 여기저기 제법 밀렸다. 화성에 도착한 것은 거의 12시. 물론 짐을 싣고 나르느라 잠시 현관문을 열어 논 사이 어디론가 사라진 까미를 찾아 츄르까지 공양을 마치고 서다.

전주 일요일에 배추를 잘라 이렇게 검은색 비닐 포장으로 잘 덮어두고 가셨다.
배추 포기가 크고 튼실해 20포기가 보통 20포기가 아니었다.
무를 5개만 가져다 두셨다기에 걱정했는데 이런 크기 무를 본 적이 없다.  나일강에서 난다던 양파 생각이... 나는 무 한 개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가자마자 황태와 다시마 표고를 넣고 국물을 우려냈다. 그 물로 찹쌀풀을 끓일 생각이었다. 황태의 고소한 냄새가 주변 청정한 공기에 섞여 멀리멀리 날아간 모양이었다. 곧 어디선가 청요리 치즈 냥냥이가 나타나 냄새의 근원지를 살피고 다닌다. 국물에서 건져 낸 건더기를 늘어놓자 새끼인 듯한 고등어까지 슬그머니 나타나 논두렁 사이를 어슬렁댄다. 도저히 그냥 넘기기 힘든 냄새가 나는 모양이었다.

창고 앞까지 진출해 내가 건져다 놓은 북어와 황태를 물어간다.
눈치를 보며 부지런히 황태포를 먹어치운다.

 막내와 둘이 칼국수로 점심을 해결하고 가져온 짐을 정리했다. 냉장고에 보관해야 할 야채들과 보쌈용 고기를 챙겼다. 막내는 3시까지 과천으로 돌아가야 한단다. 마음이 급한지 뭘 도와주면 좋으냐고 묻는다. 당연히 할 일은 많다.

전직 노동부 사무관에게 깐 마늘과 무 씻기. 파 다듬기를 시켰다. 이제는 국사에 바쁜 몸이 아니니 핑계도 없을 터. 꼼짝없이 시킨 일을 한다. 김치가 원수(?)다.

 시간은 어느새 3시를 향해 간다. 해가 설핏 기우는 게 느껴진다. 건너다 보이는 하우스에서 닭이 홰를 친다. 암탉이 알을 낳으려는 모양이다. '꼬끼오~' 소리가 자꾸 들려서인지 막내의 그 타령이 또 나온다.

 사거리 조부모님에게 맡겨졌던 3년의 기억은 막내에게도 트라우마였나보다. 지금 56번 국도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다니는 큰길이다. 하지만 내가 10살 셋째 동생이 8살 그리고 막내가 5살일 당시 사거리는 하루 지나가는 차라야 열 대가 안 되던 한적한 신작로였다. 차가 지나갈 때의 흙먼지가 반가울 정도였다.

 토요일 수업만 끝나면 셋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님이 계시던 서울 제기동으로 가려고 했다. 그 당시 우리 차비는 할머니가 기르시던 닭이 낳은 달걀이었다. 그걸 사거리 가게에 가져다주고 현금을 받아 셋이 서울을 갔다. 그 돈은 어린이 요금으로 셋이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을 거쳐 제기동 가는 시내버스를 갈아탈 돈으로 딱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를 맡아 키우시던 그 3년 동안 달걀을 거의 드실 수 없었을 것이다. 손주 셋이 졸라대는 등살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모진 분들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막내는 평일 형과 누나가 학교 가고 나면 혼자서 신작로 미루나무 아래 멍석을 깔고 실패로 만든 탱크를 가지고 놀던 기억이 지금도 나는 모양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 애처로운 기억 하나쯤은 있을 법하지만. 지금도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이 짠하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쓸슬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주위가 너무 한적하다. 11월 말이라 그런지 금요일 오후면 제법 붐비는 캠핑장이 바로 지척인데 오늘은 차량 통행도 드물다. 어찌 된 게 갈수록 주변이 적막강산이 되는 기분이다.


 일을 자꾸 줘서인지 막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원래 약속이 있었다는 걸 강조하면서. 다음 날 점심 전에는 올 수 있다기에 일찍 오라고 한 소리했다.

 3시 넘어서야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화성으로 출발한다며. 오늘따라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는 안다. 드물게 청정하고 맛있어 보이는 배추를 사 각종 양념으로 맛을 낸 김치로 재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이 아직도 만만치 않게 남았음을. 그럼에도 일손을 멈추고 잠시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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