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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Dec 06. 2022

김장에 온천행을 얹었다

 우리 세대는 눈치만 빠른 게 아니다. 잔머리도 장난 아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소신(?)이 필요했다. 남편이 나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그렇게 잔머리 굴리지 말고 그냥 되는 대로 하라고. 하지만, 큰 머리 없으니 잔머리라도 굴려야 한다는 게 나의 오랜 소신이었다. 온천행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막내가 과천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으니 허전했다. 배추를 절이는 시간은 14시간을 넘지 않아야 좋단다. 다 유튜브의 힘이다. 배추 크기가 만만치 않아 들 수도 없다. 혼자 절여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아줌마 팔뚝이지만 그 정도 힘까지는 안 되는 모양이라며 일단 절이기는 포기.

 남편이 도착해야 절이기에 돌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여유가 생겼다. 김치 대부분을 먹을 사람이 내가 아닌 데 무리까지는 하지 말자는 배짱도 있었다. 잠시 일손을 놓고 공기 좋은 데 조금이라도 걸어보자며 겉옷을 입고 나섰다. 배추 밭 옆 산길로 들어섰다.

 해가 서쪽으로 길게 잔영을 남기며 기울어간다. 맹이(심부전을 못 이기고 무지개다리를 건너 간 고양이)가 묻혀 있는 나무를 찾아 언덕을 올라갔다. 지난 추석 이후 처음인가?

3년이란 시간이 지나 어느 나무인지 헷갈린다. 하지만 지금도 나를 향해 뛰어올 것 같다. 녀석 모습이 생생하다.

 비탈이 심하지 않아도 언덕은 언덕이다. 나무를 세며 올라갔다. 아래쪽에서 세 번째 소나무. 하지만 이제 기억이 가물거린다. 소리를 내지 않고 이름만 우물거려본다. 녀석이 노란 털을 날리며 달려 내려올 것 같다.

산들레 체험학교.

 금요일 저녁이 되니 캠핑장으로 차들이 제법 들어온다. 부지런히 텐트를 치는 사람들도 여럿이다. 깊어가는 가을을 산중에서 즐기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읽힌다. 내가 두리번대는 데도 텐트 치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하긴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저녁 준비까지 해야 할 테니 마음이 바쁘겠지.

산들레 캠핑장 주변 둘레길. 승마 교실도 있어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청요리 주변 산자락을 따라 산책하다 저녁 준비를 위해 돌아왔다. 11월 말인 데도 날이 포근하다. 하지만 해는 금방 뉘엿거리는 느낌이다. 화성 청요리는 우리나라 서쪽에 치우쳐 있어 더 해가 빨리 지는 느낌이다.


 강동구에서 두 시간이나 걸려 왔다며 남편이 들어선다. 졸음운전을 하지 않기 위해 엄청 힘들었단다.


 바로 배추 절이기에 돌입했다. 남편이 도착하기 전에 물을 데워 배추를 담글 소금물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 배추 20포기니 종이컵으로 소금 10개를 섞어. 어두워지는 속도만큼 캠핑장 불빛이 더 늘어난다. 하지만 인적은 보이지 않으니 점점 적막강산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보쌈이 다 익어갈 즈음 작은 오빠가 도착한다. 소금이 부족해 보여 사 오라고 했더니 출근할 때 지갑을 놓고 가 그냥 왔다며 있던 소금을 탈탈 털어준다. 집에서 했으면 생기지 않았을 문제다.

 그래도 어찌어찌 배추 절이기가 끝났다. 소금 양이 부족한 이유는 배추 포기가 정말 튼실해서다. 다음에 일어난 문제는 믹서기. 금방 고장이 났다. 대형 믹서기를 가져왔어야 했다. 실어와야 할 물건들이 많다고 작은 믹서를 가져올 일이 아니었다. 작은 오빠가 엄마 생전에 쓰시던 소형 도깨비방망이를 찾아 줘 간신히 마늘과 생강, 배 등의 과일을 갈 수 있었다.

이제 배추 절임 통도 필요없다.

 저녁을 먹자 작은 오빠는 화목 난로를 피우고 고구마를 굽는다. 동탄에 있는 집에서 사강 쪽에 있는 회사로 출퇴근하기에 너무 멀어 청요리에서 매일 캠핑 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단다. 7080 노래까지 틀어 놓고 화목 난로 앞에 앉아 군고구마를 먹었다. 올해 심은 고구마는 굼벵이가 거의 먹어치워 별로 없단다. 고구마를 야생 멧돼지나 고라니만 좋아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굼벵이도 먹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화목 난로 위에 고구마를 구웠다. 삼겹살도 구우면 맛있다.

 달달한 군고구마를 먹으며 화목난로 앞에 앉아 있으니 매일이 캠핑이라는 오빠의 말도 맞는구나 싶다. 캠핑이 따로 없다. 청요리에서 보낸 하루가 그냥 캠핑 같다고나 할까? 김장이라는 대행사를 하러 온 게 아니라면 말이다.

 난로 앞에 앉아 있으니 너무 피곤했다. 눈이 다 침침해져 얼른 어디 가서 눕고만 싶었다. 청요리는 화성에서 남은 거의 유일한 미개발 지역이라 밤에 별이 많이 보인단다. 그런 막내의 말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린 시절 은하수까지 보이던 하늘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많이 보인다고 했는데...

월문온천 바로 옆 숙소에 머물렀다.

 피로를 풀기에 온천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겠나? 내가 김장에 온천행을 얹은 이유다.


 경기도 화성에도 온천이 있다. 나는 월문온천에 미리 방을 하나 예약했다. 청요리에서 2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온천 대실을 가끔 이용했었다. 아버지를 목욕시켜 드릴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서다.

숙소는 정갈했으나 사방이 막혀 있어 답답했다. 창은 가짜다. 난방이 잘 안 되어 으슬으슬했다

 오래간만에 온천을 갔으니 탕에 물을 넉넉히 채우고 충분히 몸을 풀 생각이었다. 그러나 웬걸~. 몸이 너무 무거웠다. 솔직히 다 귀찮았다. 깜깜한 밤이라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인근에 제암리 유적지가 있다는 표지판을 보기는 했다. 하지만 언제 거기를 들르랴? 

 배정받은 방은 썰렁했다. 카운터에 전화해 난방을 부탁해야 했다. 썰렁한데도 방안이 답답한 이유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대실한 곳은 사방이 거의 막힌 방이었다.

 온돌로 할 걸. 하룻 잠만 잔다고 생각해 너무 비용을 아낀 탓이다. 대충 샤워만 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남편은 베개가 딱딱해 잠이 안 온다며 짜증을 다 부린다. 그래도 어찌어찌 잠이 들었다. 차라리 집에 갔다 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하고 따뜻한 잠자리가 차라리 더 나았을지도.


 다음 날, 여섯 시에 일어나 간신히 머리를 감았다. 온천이 전혀 피로를 풀어주지 못한 건? 일정이 쫒기 듯한 것도 아닌데. 피곤해서인지 탕에 들어가 있기도 힘들었다. 온천물에 몸을 담가 피로를 풀기는커녕 공황장애가 되돌아올 것 같은 답답함에 방탈출을 한 거나 마찬가지. 그냥 머리를 대충 말리고 서둘러 짐을 챙겼다. 여덟 시에는 청요리로 돌아가야 한다. 배추절임 시간 때문이다. 타임 오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청요리로 가며 온천행이 분명 기발(?)하고 좋은 생각이었는데 왜 힘만 더 든 것 같은 기분이지???

 이번 김장 김치가 별로라고 하면 화를 낼 것 같은 기분이 다 들었다. 이런 노력과 고생이 들었는데???

물이 잘 나와 다행이었다. 하수구에 물도 잘 빠지니 일이 수월하고 편하긴 했다
야외용 의자 두 개를 닦아 배추 물빼기에 활용. 장소가 넓어 움직임이나 일은 편했다.

 물이 잘 나오고 장소가 넓으니 일은 상당히 편했다. 태행산 자락이라 수량도 풍부하다. 아버지는 구포리에 사실 때 일부러 청요리 지인 집으로 생수를 구하신다며 물통을 들고 오가셨다. 생수 중에 청요리 물이 제일 좋다고 하시면서. 그런 물을 마음껏 쓰고 있으니 고마운 일인가? 어찌 됐던 태행산 생수로 담근 김장 김치다.  

 집에서라면 배추 씻기도 장난 아니었을 텐데. 막상 절여서 씻어 놓으니 양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속을 넣는 것도 가볍게 해결될 것 같았다. 그래! 김치 냉장고만 일단 채우자. 김치만 쟁여둬도 겨울이 거뜬하겠지!

 

 작은 오빠가 일이 있어 동탄 집으로 가고 난 다음 막내가 올케를 데리고 왔다. 같이 보쌈 고기를 꺼내 점심을 먹고 물을 뺀 배추에 양념 속을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만든 양념이 부족할 줄이야??? 결국 남은 배추를 집에 가져와 백김치를 담가야 할 판이다. 소금이 모자라거나 믹서가 고장나는 문제가 아니라 진짜 대형 사고(?)가 난 것이다.

 남편은 막내 처남댁이 김치 속을 넣는 걸 보고 솜씨가 좋다고 돌아오는 길에 칭찬이다.

"당연하지? 미대 조소과 출신인데. 배추 속 넣기 정도야?" 


 돌아오는 길. 평소 1시간이면 되는 길을 배는 걸렸다. 우리 집은 4층이다. 지하주차장에서 김치통을 나르는데 나는 들지도 못해 6개를 남편이 혼자 날랐다. 남편 역시 피곤했던 모양이다. 김치통을 지하에서 1층으로 다시 1층에서 3층으로 두 층씩 오르내리며 올리다 말썽이 생긴 것이다. 3층 문 앞에 날라다 둔 김치통 두 개가 갑자기 사라져서다. 그 집 아저씨가 처가에서 가져다 둔 건 줄 알고 집으로 들였단다.

 이제 남편도 나도 김장을 하기에 힘이 부치는 게 맞는다. 다 날라 김치 냉장고에 넣고 나니 그제야 외출했던 큰아들이 돌아온다. 일도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더니~. 

 절여서 씻었거나 말거나 남은 배추를 그냥 하루 베란다에 방치하기로 했다.

하루 생각지도 않은 독수공방을 한 까미가 이런 자세로 한쪽 눈만 뜨고 나를 본다. 하지만 짐들이 들어오며 어수선하자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나온다.


 침대로 기어들어가기 전 고양이 세수를 했다. 발을 한쪽만 씻다 그냥 들어갔다. 갑자기 아침에 온천에서 샤워를 한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온천욕도 부담이 되는 하루를 보낸 건 나이 탓일까? 평생 나만큼 온천 좋아하는 사람 별로 없었는데!

 좋아하는 일도 몸이 견디지 못하는 일이 조금씩 더 생겨나겠지 싶으니 살짝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 생각도 잠시. 등 뒤로 까미가 몸을 기대는 게 느껴진다. 팔 베개를 해 주니 슬그머니 안겨 코를 박는다.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까무룩 잠이 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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