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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Jun 20. 2023

 제주에서 수국과 함께 선물 같은 시간을 보냈다

 아름다운 경관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뭘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음이 힘든 시간을 겪고 있을 때 제주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최근 모임을 가질 때마다 나오는 화두가 있다.

 - 우리는 모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

 맞는 말인 데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싸하다. 성큼성큼 스틱스 강을 건너간 지인들의 모습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면서 말이다.

 올해 들어 나에게도 남은 삶이 많지 않다고 느낀 건 여러 이유가 있다. 그래서 이제는 주변 사정 고려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망설이지 않고 실행한다. 그동안 의무는 충분히 했으니.

 제주를 가겠다고 할 때마다 '이제 걸릴 거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대로 다녀오라.'는 옆지기의 부주킴도 없지 않아 있다.


 제주는 한 겨울에도 여기저기 꽃밭이다. 눈 속에서도 붉은 동백이 말갛고 선명한 얼굴을 내민다. 인생이 꽃밭이길 원하면 나는 제주로 가 살라고 권하고 싶다. 제주에 가면 사계절 언제나 어여쁜 꽃을 마음껏 볼 수 있기 때문이다.

  6월. 평생 함께 동행할 1번 친구로 살았던 분을 먼저 보내신 지인이 있다. 그 마음이 헤아려졌다. 그분은 친구를 암으로 앞세워우셨다. 살다 보면 이 강을 어떻게 건너나 막막한 순간들을 필연적으로 만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친구를 보내는 과정은 지금까지 건너야 할 막막한 강 앞에 서 있던 어느 순간보다 더 막막하셨을 것 같았다. 그건 서툰 위로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권했다. 평생 함께 할 1번 친구를 잃는 심정을 나도 알 것 같아서였다.


  “샘. 저랑 제주에 가서 좀 쉬다 오실래요? 여러 군데 다니지 않고 하루 한 군데만 가요. 산책 삼아서요. 먹는 것도 대충 해요. 전 4월에 제주로 이주한 큰오빠 어떻게 지내는지 들여다보고 싶네요.”

 육지에 살아도 일 년에 4번 모이기도 힘든 오 남매. 큰오빠의 제주 이주는 본인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으나 남은 남매들은 마음이 휑해지는 일이었다.


 별 준비도 없이 가볍게 제주로 향했다. 그런데 특별하게도 제주에는 수국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육지보다 제주가 계절이 더 늦나? 서울의 수국은 모두 빛을 잃었는데???


  조카딸 이나네에 가 보니 반려묘 뽀리가 확연히 반긴다. 제 엄마 아니면 곁을 잘 주지 않는 녀석인데? 하도 까칠하게 굴어 내가 네 엄마보다 서열이 높다고 훈수를 둬야 할 지경이었었다. 가방을 풀기도 전에 수시로 들이댄다. 온통 자기 털로 집안 구석구석을 덮어 놓은 채.

 

수국만큼 한 송이에 다채로운 색의 향연을 펼치는 꽃은 없는 것 같다

 문밖을 나서니 여기저기 수국이 한창이다. 검은 담장 사이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꽃들이 정겹다.


 꽃은 자세히 천천히 보기를 원할 것 같다. 수국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은은한 향과 함께 오묘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무엇보다 단일한 색채가 아니라 향연처럼 다양한 색채가 펼쳐진다. 심지어 시간마다 꽃마다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게 바로 수국이다.

구엄리 돌염전
제주에도 염전이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구엄리 염전 바다 풍경. 기이한 화산 활동 흔적을 볼 수 있다.
만개한  혼인지 수국. 돌담 사이 갸웃거리는 모습이 새색시 같다
어디나 수국의 향연이 한창이다.
세화 바닷가 카페의 당근 주스와 케이크
상양 해수욕장의 기막힌 낙조

 종달리 수국길도 수국이 만개해 있었다. ‘소심한 책방’을 찾기 위해 마을 길을 돌아다닐 때도 수국은 돌담 사이에서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수줍은 모습들이 대충 마음 내키는 대로 쏘다니는 우리에게도 곁을 내줘 행복하다는 기분이 다 들었다.

 혼인지, 구엄리 염전, 제주의 동쪽 함덕과 조천 그리고 삼양 바닷가 어디에나 만개한 수국과 빼어난 경관은 훌쩍 서울을 떠나 방랑자처럼 기웃거리는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제주의 풍광과 수국의 향연으로 평생 친구를 잃은 샘의 마음이 위로되셨기를~


 49재에 참석하시라고 하루 먼저 지인 샘을 보내드렸다. 나만 남아 오빠 내외와 저녁을 먹고 삼양의 저녁노을을 보며 차도 마셨다. 효리네 민박에서 소개된 인도 음식점 <바그다드>에서 좋아하던 음식을 잔뜩 먹어서인지 마음이 낙낙해졌다.


 섬으로 이주해 와서 다소 외롭지 않을까 했는데. 기우였다. 매일 절물 휴양림이나 함덕 서우봉에 다니며 건강을 챙기는 오빠 내외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큰오빠는 육지 제자들과 줌으로 ‘주역’ 강의만 하기 때문인지 한결 여유 있어 보였다.


 조카딸은 내가 머문 시간 동안 밤 10시가 칼퇴였다. 거의 얼굴 보기가 힘든 정도인데도 잠시 짬을 내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빠가 더 많은 강의를 개설했으면 좋겠단다.

  “아빠가 저렇게 강의를 조금 하는 건 우리나라의 손실만이 아니라 인류의 손해지.”

 나도 그동안 쌓아둔 큰오빠의 학문적인 성과를 그냥 묵히지 않았으면 싶기는 했다. 하지만 자식에게도 이렇게 인정받는다니. 성공한 인생은 자식들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는데.  

 제주로 이주해 다소 쓸쓸하더라도 그렇게 아빠를 알아주는 딸 근처에 있으니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성수기 지나고 초가을에는 막내 동생을 꼬여 제주를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불안정한 기류로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릴 거라는 예보에도 걱정이 덜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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