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가을비가 내렸다. 서둘러 집을 나서 토성에서 기다리는 냥이에게 갔다. 종일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며칠 이른 시간에 밥을 주는 연습을 시켰다. 비가 제법 내리는 데도 기다리고 있어 밥을 먹였다.
부지런히 가락시장역으로 가 1007번 버스를 탔다. 비 내리는 창밖은 가을이 깊어가서인지 색색의 향연이 펼쳐져 눈을 즐겁게 했다. 버스정류장 이름도 화성행궁. 50년 전부터 친구였던 여고 동창 둘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구포리가 본적이다. 수원 매향동은 외가가 있어 화성에 살 때는 수원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거기에는 외사촌 언니와 오빠가 있어 함께 수원 성곽을 뛰어다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만큼 나에게 화성 주변은 어디나 고향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늘 나는 심리적으로 화성 사람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이 꿈을 이루고 싶다. <권가네 이야기>를 출판하게 되면 비봉면 사무소에서 작은 오빠가 그린 삽화와 콜라보 전시회를 여는 것. 작은 오빠가 그린 삽화는 어린 시절 화성군 비봉면 인근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풍경들이지만 기억 속에 생생한 이미지들이라 그냥 우리만 보기 아까워서다.
부모님의 귀향으로 화성을 드나들며 수원을 거쳐 가는 일이 많아서인지 수원은 나에게 익숙한 장소다. 하지만 막상 미친 듯이(고속도로를 기사님이 그렇게 느낄 정도로 달리셨다) 달려 도착한 곳은 완전히 낯선 곳.
다행히 수원과 동탄에 사는 친구들이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8살 소녀의 마음을 잃지 않고 만남의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내가 참 인복이 많구나 싶었다.
수원 친구의 안내로 성곽길 수문장 인형들이 지키는 생선구이집에서 배고픔과 한기를 채웠다. 수원에 오면 수원 사람이 밥과 차를 사는 거라며 굳이 점심까지 먹이더니 행궁을 향해 길을 건넌다. 어리바리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나를 이끌고.
상전벽해가 수원에도 있었다. 지금도 가끔 수원을 거쳐가지만 차로 지나가는 수준이었던 터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화성을 떠난 지 50년이 넘었다. 수원에 정착한 지 30년이 되어가는 여고 동창생이 추억 속에서 뛰어나와 지금이라는 현재의 화성 행궁과 성곽을 안내해 준다. 친구에게 고향을 안내받는 묘한 느낌이었다.
가을 비는 정오를 지나며 그쳤기에 찬찬히 행궁을 둘러보았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고궁에 꾸민 행사장을 둘러보았다. 봉수당에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진찬연 모습이 재현 전시되어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이 진찬연이 재현되는데 수원 사람 중 한 명을 뽑아 혜경궁 홍 씨의 역할을 맡긴다고 친구가 말해준다. 행궁 옆에 있던 초등학교도 이전하고 중건 중이라며 앞으로 행궁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까지 조곤조곤 들려준다.
정조와 정약용의 혼이 담긴 건축물로 세계문화 유산답게 원래의 궁터들이 제대로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성곽으로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수원 친구의 배낭에는 성곽 어디에서인가 먹을 간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거운 걸 지고 다니게 할 수 없다는 핑게로 성곽 루 중 한 군데 앉아 간식을 먹었다. 여고 시절로 돌아간 듯 수다가 꼬리를 물었다.
화서문까지 성곽을 따라 걸으며 주변 아기자기한 상가도 구경했다. 수원천 주변 연못에서 드물게 보이는 재두루미(?)도 보고. 변호사로 일한다는 딸과 손녀(우리가 먹은 간식 중 고구마는 어제 외손녀 유치원 텃밭에서 가져온 거란다.) 이야기를 하는 친구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수원 사람으로 정착해 살며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소개하는 얼굴이 얼마나 정겹고 행복해 보이던지...
좋은 친구들과 고향 지척 수원에서 추억 속을 제대로 걷는 기분이었다.
제법 먼 길을 나서느라 박물관 주변 냥이들 오전 급식을 이쁜이 엄마에게 부탁드렸었다. 아롱이를 못 찾았다는 연락이 와 서둘렀다. 정류장까지 미리 확인해 둔 친구 덕에 돌아오는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
제법 어둑해질 무렵.
공원 박물관 주차장에 와 보니 아롱이 사랑이 고등어 세 모녀가 우르르 나온다. 갑자기 이곳이 고향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뭔지. 나도 모르게 행복한 기분이 들어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며 밥을 먹였다.
그렇게, 마음이 한도 없이 충만해지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추억의 한 장을 살포시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