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터널이 좀 길구나.'하고 느끼는 시기가 있다. 지금이 나에게는 그런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변수가 없는 인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질병도 분명히 다가올 일이다.
남편은 지난여름 갑자기 전이성 전립선암 4기 진단을 받았다. 담당 의사 선생님은 뼈로 전이되어 수술도 불가능하다고 하셨다. 지속적인 관리를 해 왔는데도 암은 그렇게 순식간에 찾아왔다.
6개월에 한 번 맞는다는 호르몬 억제제 주사를 맞고 <얼리다>라는 신약을 처방받았다. 신약은 올 4월부터 건강보험이 적용되었단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심혈관 질환 약에 더해 제법 큰 알약을 하루 4알씩 추가로 먹어야 했다.
한 달이 넘어갈 때까지는 부작용에 대한 예후가 거의 없었다. 2달째부터 몸에 발진이 생기기 시작하고 조금씩 가렵다고 했지만 견딜만한 정도라며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약을 복용하고 두 달 만에 혈액과 소변검사를 했다. 그리고 기적 같은 결과가 나왔다. psa 암 수치가 400에서 0.2로 떨어졌다고 한 것이다. 담당 의사 선생님도 좋아하셨다. 갑자기 나락에 떨어졌다 소생한 기분이었다. 당사자인 남편은 더 기적같이 느끼는 듯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희소식을 전했다.
2개월치 신약 처방과 함께 발진으로 인한 가려움증을 완화한다는 약도 처방받았다. 발진과 가려움증은 점차 개선된다고 하셨으니 안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시름 놓는 줄 알았다. 겨우 이틀 동안이지만.
삶이 우리들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남편은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가려운지 밤이면 더 심하게 가려워했다. 부기까지 심해지며 하루 자고 나면 1킬로 이상 체중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종아리와 팔뚝만 퉁퉁 붓더니 몸통을 제외한 전부가 부어가고 가려움증도 심해졌다. 다리와 팔 손등 발등이 비정상적으로 부어올랐다. 부기 때문인지 각질이 온몸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각질이 풀풀 날릴 정도였다.
결국 한 주만에 병원 진료를 다시 요청했다. 약을 함부로 끊을 수도 없어 일단 담당 의사와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부작용이라고 했다. 신약 복용은 중단되었다. 약을 중단했어도 이틀 동안은 몸무게가 줄지 않았다. 몸무게는 11킬로까지 늘어났다. 약의 부작용에 대한 설명에 체중 감소는 있어도 부종에 대한 보고는 없었던 모양이다. 한기와 가려움으로 남편은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 약을 중단하고 이틀 만에 의사 선생님 진료는 못 봐도 전문 상담사와 상담이라도 하겠다고 요청했다. 병원에서는 비뇨기과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며 다른 장기에 이상이 생겼을 수 있으니 계속 체중이 늘면 응급실로 내원,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두려웠다.
전문 상담사는 약을 끊었으므로 문제는 없으니 피부과에 가 적극적으로 각질과 부종으로 인한 문제를 상의해 치료하라고 안내했다. 다행히 인근 피부과 선생님은 남편의 상태를 찬찬히 살핀 후 약을 처방해 주셨다.
신약을 끊은 지 3일째부터 부종과 가려움증을 완화하는 약한 스테로이드와 항히스타민제 처방약을 복용하고 남편은 몇 시간 잠을 잔다. 온몸의 부기로 수시로 긁던 것도 차츰 줄어들었다. 몸에 열이 나며 생기는 한기도 완화되는 것 같다. 가려움과 부종이라는 지옥에서 조금씩 탈출하는 느낌이다. 전신이 나무껍질처럼 우툴두툴하고 가렵긴 해도 2주 정도 지나니 부기가 빠져 몸무게가 거의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남편은 '내가 <얼리다>를 너무 과소평가했지?'라는 소리를 다 한다.
이번 일을 겪으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신약을 복용하는 사이 남편은 1년에 한 번 하는 심장혈관 촬영을 했다. 대동맥이 늘어나 그걸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중이어서다. 다행히 아직 수술할 정도로 심각해지지는 않았으니 일 년 뒤 다시 보자고 하셨단다.
그 결과를 듣는 순간 안도를 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대동맥 관련으로만 일 년 유예를 받았다는 걸. 앞으로 사는 날까지 이렇게 조마조마한 일이 반복될 거라는 걸.
지금 발병해 있는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신약으로 인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는데 앞으로 이 일에도 얼마나 더 유예가 가능한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나이가 드니 건강에도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되는 모양이다.
대부분 잊고 살지만 우리 모두는 영원히 살 수 없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 그걸 피할 수 없다.
인생의 가을이 된 내 나이 또래는 건강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다투어야 한다.
나도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성적표처럼 펼쳐보기가 조마조마해진다. 혈액검사 결과 하나로 일희일비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욥기에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기와 조각으로 가려운 몸을 긁는 욥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순전하고 정직하며 신앙이 온전했던 사람인 욥에게도 시험은 있었다. 감히 나의 연약한 신앙을 욥에게 빗댈 수는 없으나.
가려움증으로 남편이 밤새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보며 그래도 내가 찾은 건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지난여름 은토끼님의 은퇴 휴가로 매일 하루 두 번 공원으로 냥이들 밥을 주러 다녔다.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매일 두 번 이상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그런데도 내 몸에 붙어 있던 살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켰다. 절대 빠지지 않을 것처럼.
그런데, 남편의 잠 못 드는 밤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살이 내렸다.
여름에 도통 쉬지를 못했으니 가을이 되면 억새를 보기 위해 제주도를 가고 싶었다. 암수치가 확연히 떨어지는 신약을 찾았으니 안심하고 이제 나도 좀 쉬어보자는 생각에 당장 제주 왕복 항공권을 예약했다. 산굼부리나 새별오름의 은빛 억새 물결도, 가을 바다도 보고 와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일정을 접어야 했다.
마음이 아직 설렐 때,
다니라고 말이 있다.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낙엽은 쌓여가는데...
그러나, 남편이 혼자 외롭게 고난을 겪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바라게 된다. 인생의 가을이 완전히 깊어가기 전에 마음 맞는 사람들과 가을 여행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축복이 나에게도 제법 남아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