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사방이 다 벽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집 사람이 저 상태를 유지해 주는 것만 해도 안심이 되고 다행이다 싶어요."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려다 뚝 그쳐졌다. 나는 가서 볼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인데. 근육이 몸에서 사라져 말부터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게 된 친구가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도 가지기 힘든데!
한 달 만에 친구를 보고 돌아오는 길.
24시간 옆에 붙어 간병하는 친구 남편의 말이 오래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이런 경지까지 갈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이런 헌신이 가능할까? 아내의 얼굴과 손을 소중하게 닦아주는 꼼꼼한 손길에 담긴 마음. 그게 보였다.
벌써 3년.
어렸을 때는 나라를 구한 영웅 정도는 되어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만큼 살아 보니 누군가 어렵고 힘들 때 진심을 다해 아끼고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훌륭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친구의 집을 갈 때는 저 멀리 남한산을 마주 보고 간다. 남한산은 아카시아 꽃이 만개해서인지 산색이 온통 하얗다. 세월의 흐름은 공원만이 아니라 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나는 산보다 바다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길에도 산을 마주할 수 있다면 자꾸 뒤돌아보며 바닥을 치려는 마음을 조금 더 달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헛생각에 빠져든다.
신약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희망이 들어설 자리를 조금이라도 넓히려 애쓴다. 하지만 나는 겨우 한 달에 한 번 숙제처럼 드나들기도 마음이 버겁고 힘들다. 그걸 숙제처럼 한다. 아직도 마음속에 의문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왜? 무엇 때문에? 친구의 삶은 그렇게 일찍 희귀병으로 내몰렸는가?
돌아오며 남편에게 박물관 뒤쪽 계단 주변에 세워달라고 했다. 남편은 친구에게 다녀올 때마다 말수가 확연히 줄어드는 나를 배려해 말을 아낀다.
차 안에 미리 챙겨두었던 고양이들 사료와 캔 그리고 물병이 든 봉투를 집어드니 조심해서 다니라는 염려의 말만 한다. 그 속에 담긴 뜻이 읽힌다. 고양이들 보고 마음이라도 좀 달래라는.
사흘 째 봄비가 그치지 않고 부슬부슬 내린 탓에 잔디가 다 젖어 있다. 얼마 걷지 않았는 데도 바지와 운동화가 금방 푹 젖어버렸다. 폭우는 아니라도 제법 비가 온 그 이틀 동안 은토끼님은 냥이들을 찾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것이다. 제법 묵직한 가방을 들고 다니셨을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비로 연휴 인파가 줄어들긴 했겠지만 일기가 안 좋으면 고양이들 고생도 만만치 않다.
사랑이는 하늘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옆 구조물에 이렇게 숨어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기다린다. 그 모습이 짠해 보이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늘 대답을 야무지게 하는 사랑이지만 나도 모르게 더 크게 부른다.
아롱이가 다행히 주차장 근처 야트막한 둔덕에서 기다리다 반색하며 뛰어왔다. 비가 와 사람들 출입이 적긴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 수국 나무 아래로 데려가 밥을 먹였다. 아롱이를 쉽게 찾으니 묵직했던 마음이 조금 덜어지는 느낌이다. 친구에게 다녀오느라 밥을 먹이러 오는 시간이 늦어졌다. 귀요미와 다롱이도 찾아 먹이를 다 먹는 것까지 보고 돌아섰다.
요즘 또 다른 난관은 고등어. 환풍기 주변으로 가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는다. 잔디를 깍지 않아 제법 무성한 풀이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어 등산화 속 양말까지 젖어버렸다.
비는 보슬거리며 쉬지 않고 내렸다.
천천히 토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전날은 찔레나무 그늘에 숨어 있던 초화가 나를 보고 뛰어나와 밥을 먹였었다. 비가 소강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쉬지도 않고 내리는 오늘은 찾을 수 있을까?
가끔은 이 덤불숲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 고양이다~!'라며 까만 턱시도 고양이가 쫓아오는 걸 알려준다. 내 발걸음을 미처 따라오지 못해 몸을 드러내는 경우에 그렇다.
나에게 꼬박꼬박 닭가슴살과 캔을 챙겨가던 삼색이 녀석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카시아 꽃잎이 즐비하게 늘어진 길을 왔다 갔다 하며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초화와 삼색이가 나오는 덤불숲 주변에는 급식소가 두어 개 있다. 매일 11시 무렵 고양이 밥을 주러 오시는 남자분이 계시다. 뭐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자신을 기다리는 고양이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분의 다감한 성품 탓이겠지? 적어도 밥을 굶지는 않겠지 하며 돌아섰다.
흙길 위에 하얀 주단처럼 깔린 아카시아 꽃잎이 아쉬워서일까? 만나지 못한 두 녀석이 궁금해서일까? 제대로 이름을 지을 수는 없어도 숙제가 덜 끝난 기분이 되어 나도 모르게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