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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냥이 아롱이 - 22. 이모 고양이의 모성애

by 권영순

4월 26일. 아로의 새끼 중 세 번째로 발만 하얀 아이가 죽었다. 이모 아미는 평소에도 유독 녀석을 끼고 살았다. 이 글은 그날 새끼의 죽음에 놀라 미련하게 굴었던 내 행동이 너무 미안해 써 둔 것이다.

특이하게 발만 하얀 녀석. 눈에 이미 힘이 없어 보였다.
이때만 해도 혼자 집을 드나들고 지붕 위에도 올라갔다.

- 아롱이 딸 아미는 공원에 사는 고양이다. 공원 냥이 아롱이에게 붙들려 나도 모르게 집사가 된 지 햇수로 3년. 그러나, 고양이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그 무지함이 뼈아프게 돌아와 나를 반성시킬 일이 연속해서 생길지 정말 몰랐다.

21년 3월 9일. 아롱이 딸 아로가 무려 6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누가 아빠인 줄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새끼들 모두 특이하게 꼬리가 짧았기 때문이다. 아롱이는 지난 해 3월 말에 새끼를 네 마리 낳았다. 아니 그렇게 추정된다. 5월 말이나 되어서야 새끼들을 보여줬으니까 몇 마리나 낳았는지 잘 모른다는 게 팩트다. 나는 아로도 아롱이 딸이니 새끼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데리고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를 놀라게 한 건 아로가 새끼를 낳은 장소였다. 은토끼님이 마련해 준 집에 낳았기 때문이다. 새끼 한 마리는 이미 죽어있었다고 하셨다. 남은 새끼 냥이들은 모두 다섯 마리.

공원 안에서도 아로가 새끼를 낳은 곳은 유일하게 고양이 랜드 취급을 받는 곳이다. 불특정 다수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는 뜻이다. 아로 새끼가 태어나자 거의 매일 얼굴 도장을 찍는 사람들도 생겼다. 문제는 사람들의 의식이었다. 분명 전담해서 돌보는 자원봉사자들이 있는 걸 알면서도 거의 공유 동물 취급을 했다. 길냥이라고 생각해 함부로 대해도 되는 장난감 취급을 한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아로 새끼들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심지어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새끼들을 집에서 꺼내 함부로 만지는 경우도 있어 자원봉사자와의 마찰도 생겼다.

그리고, 이유도 모른 채 새끼들이 한마리씩 죽어갔다. 젖을 떼지 않아 병원에 데려갈 수도 없었다. 사람들 냄새가 묻으면 어미에게 버림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끼들의 연속되는 죽음은 전담 자원봉사자 두 명의 혼을 빼놓았다. 밥을 챙기러 갈 때마다 혹시나 새끼들에게 변고가 생겨 있을까 봐 발걸음이 무거웠다. 새끼들이 왜 죽는지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처음 새끼가 죽었을 때 사진을 찍어 동물병원에 갔다. 남은 새끼들도 위험할 수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동물 병원 선생님은 사진만으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셨다. 죽은 새끼를 어미 앞에서 빨리 치우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새끼를 치워야 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어미인 아로는 뭘 줘도 잘 먹지 않았다. 새끼를 돌보는데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대신 이모인 아미가 새끼들을 돌보았다. 아미도 아롱이 딸이다.

아미는 중성화되어 강제로 새끼들을 잃었지만 아로보다 육아에 더 적극적이었다. 행여 새끼들이 집 근처를 헤매고 돌아다닐라치면 부지런히 달려가 물어다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아로가 밥도 안 먹고 새끼들 젖도 주지 않자 새끼들은 어미 대신 이모 아미에게 달라붙었다. 아미에게 젖이 나오는지는 잘 모른다. 우리가 아는 건 아미가 출산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 데려다 중성화시켜 돌려보냈다는 거다. 빨갛게 헐어버린 아미의 젖꼭지를 볼 때마다 우리는 아미한테 미안했다.

아로에게 무엇이든 먹이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점점 힘겨워 포기할 정도가 될 무렵. 두 번째 새끼도 죽었다. 유일한 삼색이였다. 이제 세 마리가 남았다. 충격이 컸는지 아로는 갈수록 말라갔다. 뼈만 앙상할 지경이었다. 새끼들도 돌보지 않았다.

아로의 새끼 중 온몸이 까만데 발만 하얀 녀석이 있었다. 나는 젖을 뗄 무렵 녀석을 하얀 발이라고 부를 생각이었다. 이름을 지어줘야 살아날 것 같아서였다. 어미 젖을 떼면 입양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새끼들을 입양하고 싶다는 사람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실행은 하지 않았다. 그냥 말만 해보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가 보니 잘 돌아다니던 하얀 발이 기운이 없어 보였다. 아기 고양이용 캣 밀크에 캔이나 파우치를 조금씩 먹기에 살짝 안심하고 있던 터였다. 어미에게 밥을 먹이고 일부러 새끼들 젖을 주라고 떠밀어 보기도 했다. 소용없었다.

4월 26일. 냥이들 집 주변 명자나무 붉은 꽃잎이 땅바닥에 흐드러지게 떨어졌다. 대신 들 수국이 하얀 몽우리를 조롱조롱 매달아가고 있었지만 봄은 짧게 왔다 스러져가는 느낌이었다.

전날 하얀 발이 한기를 느끼는지 몸을 떠는 걸 보고 와서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하얀 발이 보이지 않았다. 제법 우거진 나무 아래를 기어들어가 살펴보았다. 집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 있었다. 나무 가지가 서로 얽혀 제법 깊숙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파리떼가 죽은 새끼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절로 한탄이 나왔다. 어제 무조건 병원을 데리고 갔어야 했나 하는 후회였다. 너무 미안했다. 그렇게 짧게 세상에 왔다가는 녀석에게 해 준 것이 없어서.

며칠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땅이 잘 파지지 않았다. 억지로 땅 일부를 팠다. 냥이들 집이 있는 근처 들 수국 아래 묻어주었다. 자책감에 빠져 나는 어미 아로나 이모 아미의 충격을 정말 고려하지 않았다. 솔직히 고양이들이 새끼들 죽음에 무슨 큰 충격을 받으리?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실수였다.

힘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 들어 터덜거리며 근처 쓰레기통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어떤 예감에 능선을 바라보던 내가 목격한 것은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새끼가 죽은 것에 대한 내 감정 처리도 힘든 상태라서인지 충격이 더 컸다.

아미는 내가 땅에 묻은 하얀 발을 파내 입에 물고 울창한 뽕나무 아래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더니 새끼를 품에 끌어안고 온 몸을 핦아주며 그루밍을 시작했다. 그 모습은 나를 정말 울컥하게 만들었다.

10여 미터 거리에서 아미가 흙을 파대는 능선을 올려다보는 순간부터 나는 너무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다. 고양이의 모성애를 가볍게 생각한 내 불찰이었다. 나는 어미와 이모 고양이 근처에서 새끼를 땅에 파묻으면 둘이 어떤 상처를 받을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하얀 발은 이모 아미가 평소 극진히 돌보던 새끼였다. 아미는 나랑 다르게 새끼의 죽음을 용납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더구나 땅이 단단해서 흙이 잘 파지지 않는다고 짜증을 낸 내 행동이 떠올라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새끼에게도 미안했지만 자기 새끼처럼 끼고 돌보던 아미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이번에는 냥이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갔다. 비닐장갑을 끼고 다시 죽은 새끼를 데려다 흰 수국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나무 아래 묻어 주었다. 그곳 흙은 나무가 우거져서인지 땅이 말라 있지 않았다. 쉽게 흙을 팔 수 있었다.

‘아가야. 정말 미안하다. 너를 데리고 어제 병원이라도 갔어야 하는 건데. 널 방치한 거 같아 내가 진짜 미안하다.’

아미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미에게 돌아가서 미안하다며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아미는 날 피해 멀찍이 가 버렸다. 어쩌다 산책 온 개에게 쫓겨도 나를 보면 달려와 옆에 척 붙어 앉는 녀석이다. 갑자기 기세가 등등해지며 더 이상 피하지도 않고 개를 똑바로 쳐다봐 개주인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자기에게도 돌보는 저만의 집사가 있다는 표시를 그렇게 하던 녀석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아미를 똑바로 보기 힘들 정도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이모 고양이의 모성애를 가볍게 생각한 내 탓이 크다는 자책감이 머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아미 행동의 잔상이 여운처럼 남아 나를 오래 미안하게 만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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