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변함없이 순차적으로 계절을 데려오고 있었다. 긴 겨울을 보낸 나무나 초화류에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는 봄이 돌아왔다. 산수유에 이어 매화, 목련이 피더니 어느새 벚꽃이 조롱조롱 꽃망울을 달아 공원을 화사하게 만들었다. 나뭇잎들도 돋아나 곧 난만한 봄을 우리에게 선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냥이들 집 주변에도 명자나무 꽃이 피었다 지더니 들 수국이 하얀 꽃망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아로가 낳은 새끼들이었다. 새끼들은 우리 기대만큼 무럭무럭 자라주지 않았다. 아로 새끼들은 삼색이 한 마리에 턱시도가 네 마리였다. 4월이 되자 눈을 뜨고 돌아다니기 시작하던 새끼 한 마리가 비슬거렸다. 그리고 며칠 되지도 않아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당시 고양이 보호협회 회원들도 돌보는 새끼들이 자꾸 죽는다며 걱정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다. 정확히 모르겠지만 공원에 고양이 허피스가 돈다는 소문이었다. 물론 어미 아로가 산후 우울증을 겪나 싶을 정도로 새끼들 젖을 먹이지 않고 심각하게 방치해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로에게 닥친 문제는 우리들의 지나친 개입과 돌봄 탓이었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자꾸 생겼다. 나는 지금도 그 점을 많이 반성하고 있다. 아롱이처럼 어느 정도 선을 그어가며 주변에서 돕는 정도가 옳지 않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로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믿었던 곳은 사실 새끼들을 키우는 데 가장 불안하고 위험한 장소였을 지도 모른다.
산후우울증이라고 생각될 만큼 헤매는 아로의 이상 행동에도 꿋꿋하게 옆에서 새끼들을 돌본 것은 누구일까? 이모인 아미였다. '꼬짤'이 나타나면 아로가 녀석을 쫓아 사라져도 아미는 새끼들 옆에서 젖을 물리고 그루밍을 해 주고 능선 아래로 내려가면 어느 틈에 달려가 집으로 데려왔다. 마치 아미가 엄마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내가 밥을 주려고 가 보면 먼저 와서 고양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아미가 엄마냐고 물었다. 어쩌면 새끼들에게 저렇게 지극정성이냐면서.
나는 그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많은 짐승들이 종이 다른 새끼들도 자기 자식 못지않게 키운다는 보고가 있다. 그런 자연 속의 특이한 이야기들을 여러 번 읽은 적이 있어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아미의 행동은 나를 정말 놀라게 했다. 조카들이니 '피의 끌림이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고등어도 아로의 새끼들을 돌보았다. 수컷 고양이가 새끼들을 돌보는 경우도 있나 싶었다.
이미 중성화된 두 녀석이 쉴 새 없이 새끼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며 나는 고양이가 이기적이라는 편견을 버렸다. 아미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눈치채면 어느새 고등어가 달려갔다. 처음에는 고등어가 새끼들을 물어 집 주변으로 데려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걸 여러 번 보며 '내가 지금 무슨 장면을 보나?' 싶었다. 아미가 새끼들의 엄마라면 마치 고등어는 아빠처럼 보였다.
정작 제 엄마와 아빠는 주변에 함께 있어도 둘이 붙어 앉아 '로맨스나 찍는군.' 하는 장면을 연출해 나를 짜증 나게 했다. 애들 돌보기는 남에게 맡기고 둘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구경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열이 나서 '꼬짤'을 더 구박하게 되었다. 원래 마음에 안 들던 녀석 더 미운 행동을 한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이게 인간의 편견이라는 건 나도 안다. 그러나 엄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새끼들에 대한 연민이 생기면서 나는 사실 그 시점부터 아로가 부담스러워진 게 아닐까 싶다. 제 엄마 아롱이에게 분명 무언가를 배웠을 텐데. 그 무한 책임감이 왜 아로에게는 없나 하는 원망과 함께 말이다.
아롱이 밥자리에 끼어들어 업둥이로 들어온 다롱이는 또 달랐다. 중성화되었지만 다롱이는 암컷이었다. 그런데도 아로 새끼들을 귀찮게 여기는 모습이 역력했다. 여전히 좋은 먹이는 자기가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새끼들이 다가와도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로 밀치기까지 했다. 어른(?) 답지 못할 정도로 자기 먹이만 챙겼다. 하긴 아롱이가 새끼들을 키울 때도 종종 비슷한 장면이 있긴 했다. 아롱이는 자기 먹이에 입을 대고 같이 먹어도 다롱이를 견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롱이가 새끼들을 조금만 건드리는 눈치가 보일라치면 절대 가만 두지 않았다. 순간 이동을 했나 싶게 달려가 얼마나 매섭게 다롱이를 닦달하던지.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새끼들을 위한 전용 먹이를 주려면 일단 다롱이와 실랑이를 거쳐야 했다. 악착같이 거기에 입을 대고 무조건 먼저 먹으려 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다롱이의 이런 행동 때문에 은토끼님과 녀석이 너무 밉다는 뒷담화를 할 정도였다.
다른 문제도 생겼다. 4월이 되면서 아이들이 밥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하는 날이 자꾸 생겨서였다. 이상행동은 다롱이에게 먼저 나타났다. 밥자리에 없어 근처로 찾으러 다녀야 했다. 이미 일 년이 넘게 다롱이 밥을 먹여 본 나로서는 아주 특이한 행동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밥은 이기적일 정도로 챙기는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꼬짤이 나타나면 밥을 먹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고등어도 찾으러 다녀야 했다. 우리가 찾지 않아도 밥때를 누구보다 잘 챙기던 녀석들의 별난 행동은 한 동안 계속되었다. 그때 사태를 파악했어야 했다. 적어도 밥자리와 잠자리를 분리하는 작업을 했어야 했던 것이다.
나는 1년 전 아롱이가 새끼 낳을 시기가 되자 노랑이와 까망이가 밥자리에서 분리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연속되는 새끼들의 죽음으로 멘붕이 왔기 때문에 더 냥이들의 이상행동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4월 11일이었다. 오전에 나가니 고등어가 그나마 멀쩡하던 한쪽 눈까지 심하게 다친 상태로 나타났다. 놀라서 녀석을 데리고 병원에 가려고 은토끼님에게 전화를 했다. 일단 내가 여기서 지키고 있을 테니 나오셨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한 것이다. 은토끼님은 놀라서 이동장을 챙겨 택시를 타고 달려오셨다. 그러나 그 사이 고등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는 밥자리는 물론 그 어디에서도 고등어를 볼 수 없었다. 고등어의 눈을 그렇게 만든 건 누굴까? 나는 보자마자 왜 꼬짤을 떠올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