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중이 초보 집사 시절. 아롱이 때문에 공원을 드나들며 냥이들 밥을 주기 시작하던 그때도 은토끼님 때문에 놀란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로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은토끼님은 회사에 반차까지 내가며 직접 동물장을 찾아가셨다. 아로에게 미안해 그냥 있을 수 없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같이 나서지 못했다. 함께 가겠다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죽은 아로를 다시 봐야 하는 게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 내 정서의 임계치를 넘어선 것 같았다.
아로는 중성화 수술을 위해 병원에 도착해서 난동을 부리다시피 했다. 간신히 잡아 동물 이동장에 다시 넣고 난 다음 아로의 눈을 보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눈동자 색이 짙어지며 나를 바라보던 그 신뢰 가득한 눈동자. 나는 지금도 그 눈동자를 간간히 떠올린다.
특히 입양한 까미가 그 비슷한 눈으로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아로가 생각나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로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생겨서다.
아로의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공원은 내게 많은 것을 선물하는 장소였다. 그곳은 소소한 즐거움들로 가득한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아롱이도 만났다. 아롱이가 새끼를 낳아 기르는 걸 지근거리에서 보며 잔잔한 행복감을 느낀 적이 많다.
연이어 돌아가신 부모님과 긴 시간 함께 지내던 고양이를 잃었어도 정서적으로 휘청거리지 않았다. 퇴직 후 찾아온 공황장애도 어느 순간 치유되었다. 공원 산책과 아롱이 가족들에게 도시락 배달을 한 건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삶의 동력이었다. 그게 내가 얻은 것이었다. 누가 이걸 작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나 눈이 내려도 강풍이나 폭우가 쏟아져도 공원을 찾는 내 마음엔 늘 온기가 있었다. 빨리 가서 냥이들을 보고 싶었다. 밥을 잘 먹으면 그것도 즐거웠다. 물론 먹이 결정권은 내게 있는데 왜 너희들 입맛을 주장하느냐는 소리를 수시로 한 건 사실이다. '그 밥 아니'라는 눈치를 주며 주는 걸 안 먹을 때 말이다.
냥이들이 보이지 않아 여기저기 찾으러 다녀도 부르면 나온다는 믿음이 있었다. 오전에 안 나오면 오후에는 반드시 나온다고 느긋하게 생각할 수 있어서였다. 걱정은 되었다. 특히 오늘처럼 갑자기 날이 바싹바싹 추워지면 시선이 자꾸만 공원 아롱이 가족이 지내는 곳으로 향한다.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거칠어질 때면 한데서 잠을 자야 하는 냥이들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아롱이 가족의 존재는 단순한 공원 냥이들이 아니었다. 어느새 삶의 의미가 되어 있었다. 냥이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작은 즐거움으로 얻은 삶의 동력은, 노년을 향해가는 내게 많은 것을 선사했다. 생애 가장 두려운 부모와의 사별이라는 큰 슬픔을 덮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아롱이 가족은 내게 그런 존재들이었다.
공원 냥이들은 태생이 게으른 내게 무조건 집을 나서게 만들었다. 집에서 틈나는 대로 뒹굴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폭설이 쏟아져도 등산화를 꺼내 신고 집을 나섰다. 날이 춥고 길이 미끄러워도 추위에 떨고 있을 냥이들의 기다림을 외면할 수 없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지나치다고 걱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퇴직 후 남들이 겪는 무기력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된 나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아로 사건은 아직 어중이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의 나를 심각하게 좌절시켰다. 알량한 집사 생활에 심각한 위기를 맞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심리적인 타격도 사치라는 걸 알게 되는 날이 곧바로 닥쳐왔다. 고양이를 혐오하는 그 누군가가 상상도 못 한 엽기적인 일을 벌여 자원봉사자들을 잔뜩 긴장시키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 제목은 이근후 님의 책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에서 차용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