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의 죽음은 나나 은토끼님에게 깊은 좌절과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좌절과 상처에서 허우적거릴 시간도 여유도 없는 심각한 일이 생겼다. 누군가 공원 새끼 고양이들을 잔인하게 죽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뉴스에 나올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전에도 토성으로 올라가는 칠지도 계단 아래 서식하던 새끼 고양이를 독살한 경우가 있었다. 그때도 경찰이 오고 난리가 났었다. 과학수사대까지 동원되었지만 범인을 특정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 이후 더 심각한 범죄는 발생하지 않아 고양이를 돌보는 자원봉사자들이 안심하고 있던 차였다.
범행은 말로 옮기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 사이코패스라고 말하기도 뭐한 동물 혐오자들은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었다.
지난 겨울, 냥이들 밥자리에 음식물 쓰레기를 테러하고 집을 가져다 버렸던 일은 애들 장난으로 치부될 정도였다. 잔인하게 새끼 고양이를 도살한 그 누군가는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새끼 고양이를 죽이고 간을 빼갔다는 소리를 듣고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도 아니고 '이게 뭐지?' 싶었다. 살해된 새끼 고양이를 직접 본 자원봉사자는 회사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라며 충격을 토로하셨다.
사실 그 무렵 나는 아로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더 이상 자신이 없었다. 진심으로 도시락 배달을 어느 시점에서 그만두어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 엄마 잃은 아로 새끼들 보기도 버거웠다. 이모 고양이 아미에게도 미안했다. 갈수록 나는 고양이를 돌보는 자원봉사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의무로 하기에 버겁다면 그만두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롱이와 귀요미 그리고 무엇보다 아로 새끼들은 어쩐단 말인가?
은토끼님은 공원이 직장일 뿐 실제 살고 계시는 지역은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근무를 안 하시는 날 지금까지 돌보던 냥이들 도시락 배달은 어떻게 하는가? 일단 다른 집사를 구하실 때까지만 해야 하나? 다른 집사 구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건가?
아니면, 아롱이와 귀요미가 더 이상 밥을 먹으러 나오지 않을 때까지는 해야 하나? 나는 일단 후자까지는 책임을 다하자 싶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심각한 문제가 터진 것이다. 은토끼님은 고민 끝에 나에게 상의를 해 오셨다. 집에 네 마리는 좀 힘드시니 우리 집에서 한 마리 더 입양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형편이 안 되어도 까미를 입양했으니 한 마리 더 데려오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가족들이었다.
사실 까미도 심심치 않게 문제를 일으켰다. 뭔가를 깨무는 버릇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다. 전선을 깨물어 놓는 건 약하게 치는 사고였다. 여기저기 보관돼 있던 겨울 용품들의 전선을 깨물깨물하여 결국 내다버리게 생긴 것들이 여러 개였다.
작은 아들은 대학 미래 교육원에서 촬영을 가르친다. 하루는 수업을 위해 당장 들고 가야 하는 카메라 부품이 망가지는 황당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책상 위에 올려둔 카메라를 까미가 어느 틈에 가서 물어뜯어 놓았던 것이다. 그날 남편은 새로 산 자기 운동화도 물어뜯어 놓은 거 그냥 신고 다닌다며 허허거렸다.
우리 집 세 개의 방 중 두 개에 널린 각종 컴퓨터와 기자재들 때문에 가족들의 동의는 필수였다. 고양이가 건드리지 못하게 어떤 방식으로 방을 정리하느냐며 의견이 오가는 차에 제주에서도 연락이 왔다.
조카딸이 이사를 한다는 전화였다. 그곳에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내 짐들이 잔뜩 있었다.
은퇴를 하고 제주 모 여고에서 논술을 가르치며 생긴 짐이었다. 갑자기 공황장애가 생겨 비행기를 못 타는 바람에 한동안 제주를 오가지 못해 방치해 둔 논술 자료와 옷, 책 등이었다. 캐리어 몇 개 분량의 짐을 이삿짐으로 끌고 다니라고 할 수도 없으니 결국 내가 직접 가서 처리해야 마땅했다.
내가 아들들 의논을 기다리는 사이 은토끼님은 아이들을 모두 입양하시기로 마음을 굳히신 모양이었다. 죽은 아로를 생각해서라도 새끼들이 무슨 일을 당하는 건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더구나 우리가 돌보는 냥이들 서식지는 너무 노출되어 있었다. 아미나 아로 새끼들은 사람을 친근하게 여겨 안전한 곳으로 숨는 아이들이 아니다. 나는 새끼 한 마리를 제주에 다녀오는 2주간만 임시 보호하셨다가 다시 데려다주시면 어떠냐고 물었다. 하지만 내 사정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그건 새끼들에게 미안하다며 그냥 키우겠다고 하셨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그 무렵 1차 백신을 맞고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긴 시간 서 있거나 걷기도 힘들어 조금 움직이면 어딘가에 주저앉아야 할 정도로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까미와 아로 새끼를 누가 키울 것이냐는 문제까지 가족들과 상의했다고 말하면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실제 그런 의논까지 했다.
같은 인간인데도 누군가는 동물을 지키려 온갖 노력을 다한다. 공원 자원봉사자들은 그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공원에 고양이들이 너무 많다며 숫자를 줄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공원 고양이가 늘어나는 이유가 캣맘들 때문이라며 입씨름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건 고양이들이 아니다. 공원에 고양이들 먹이가 널려 있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캣맘들과 입씨름을 불사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동물에 대한 막연한 혐오가 깔려 있다. 고양이들이 새나 다람쥐를 해친다는 근거 없는 말로 공원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게 고양이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게 결국은 캣맘들 탓이니 너희들이 그렇게 안타까우면 집으로 데려다 키우라고 큰소리로 싸움을 거는 것이다. 그게 맞는 말일까? 고양이를 돌보는 사람들은 애니멀 호더가 아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누군가와 나누는데 그게 공원 고양이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