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6월 13일. 은토끼님은 아로 새끼 두 마리만 데려가셨다. 이모 고양이를 같이 데려가시려고 갖은 애를 다 쓰셨으나 막상 아미가 잡히지 않았다. 아들과 공원 고양이 보호협회 회원들까지 동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포기하고 귀가하신 것이다. 아로 사건 때문일까? 아미는 새끼들이 든 이동장 주위만 빙빙 돌뿐 끝내 잡히지 않았다.
시끄러웠는지 어디서 아롱이가 나타나 주차장 주위를 왔다 갔다 했다. 우리는 아롱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네 딸 아미 좀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롱이는 못 들은 척하며 하늘공원 위로 올라가 버렸다. 짜식! 좀 도와주지!
제주를 오가야 하는 일 때문에 나는 입양을 2주 정도 미루면 새끼 한 마리를 우리 집에서 키우겠다고 은토끼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새끼에게 익숙한 나의 존재가 꼭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한 것이다. 이사 날짜는 변경 불가능하기에 한 부탁이었다.
가족들은 난색이었다. 소소하게 부리는 말썽보다 고양이 털과 먼지가 각종 장비들에 날려 들어가는 게 문제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반대 의견을 말하는 큰아들에게 장비를 들고 독립해 나가 살라며 그래도 내 편을 들었다. 현실적으로 독립은 불가능한 소리였지만 말이다.
은토끼님은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신 모양이었다. 한여름 납량 특집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일이 생기자 하루라도 새끼들 데려가는 날을 미루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고양이들 안전에 관한 한 행동력이 정말 놀랍다 싶었다. 나는 속으로 진심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용기도 행동력도 대단하시다고.
새끼들을 데려가신 다음 날은 은토끼님 휴무셨다. 나는 도시락과 이동장을 들고나가 아미에게 너라도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서 까미와 살지 않겠냐고 청했다. 까미가 입양되기 전 아미와는 상생이 맞는지 자주 붙어 앉아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미는 이동장에 다가와 냄새만 맡아보고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혹시 새끼들 냄새가 나는지 알아보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짠했다. 밥도 잘 먹지 않고 박물관 입구 철쭉나무 사이에 힘없이 앉아 있는 아미를 두고 오는데 어찌나 마음이 무겁던지.
다음 날, 출근하신 은토끼님 전언에 의하면 이렇다. 아미에게 나랑 아가들 있는 데 가자고 팔을 벌리니 스르르 안겨 이동장에 넣는데도 저절로 들어가 놀라셨단다. 여럿이 나서서 그렇게 잡으려 해도 안 잡히던 녀석이었는데. 아미는 그렇게 은토끼님을 따라갔다. 아니 따라나섰다.
나는 아이들의 선택에 놀랐다. 아롱이 새끼 네 마리는 다들 특별한 데가 많다. 공원의 다른 냥이들보다 머리가 좋고 사람과 살아가기 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다가가려 적극적으로 애쓰는 냥이들을 만난 게 어쩌면 내 운이 좋았던 거다. 나는 지금도 까미를 키우며 그렇게 생각한다.
아미가 은토끼님 집으로 들어가기 전 이틀 동안 새끼들은 어땠을까? 까로는 새끼들을 보자,
'이것들 뭐지?' 하는 표정으로 냄새를 맡아보고 주위를 빙빙 돌더니 금방 무심해졌단다. 반면 새끼들은 엄마를 찾는지 자꾸 울어 마음이 안타까웠는데 아미를 데려다 주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눈물겨운 그 상봉을 나도 봤어야 한다고 전해주셨다.
나는 가끔 아로를 떠올릴 때마다 웃어른들이 고양이는 영물이라고 하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로는 은토끼님이 아미까지 입양하려던 걸 알았을 거다. 모두 입양되고 자기만 홀로 공원에 남아야 한다는 것도. 결국 아로는 죽음으로 자기가 낳은 새끼 두 마리를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누구보다 사랑해 줄 사람의 집으로 들여보냈다. 어미로서 아로의 마지막 선택이었을까?
공원 고양이들 사이에도 새끼들을 해치려는 그 누군가의 존재에 대해 알음알음 소문이 돌았을 거라고 본다. 나는 한동안 아로가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자식을 위하는 엄마 고양이 아로의 진심이라고.
아로의 그 선택에 대해 어쩐지 이해가 되는 건 나도 두 아이를 기른 엄마라서가 아닐까? 하는 잡생각을 해 본다. 고양이 아로의 모성애는 죽음으로 증명한 게 아닌가 싶어 그 애달픈 삶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겨우 1년 3개월 살다 간 공원 고양이 아로를 오래 추모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