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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역 최종 보스 아롱이!

by 권영순

이틀간 공원에 나가보지 못했다. 최근 입양된 아롱이 딸 나리를 돌보러 화곡동 아들 집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아들의 지방 일정으로 익숙하지 않은 집에 홀로 있어야 하는 나리를 위해 출장을 간 것이다. 입양 책임 일부가 나에게도 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가자 싶었다.

나리와 지내고 어제 오후 집으로 돌아왔다. 녹내장으로 안압이 정상치보다 높아 안약을 넣어줘야 하는 까미 때문이다. 저녁이면 작은 아들이 돌아올 예정이기도 했지만 까미 안약도 가능하면 시간 배분을 잘해 넣어줘야 한다. 집에 와 까미를 찾으니 옷장 이불 속에 숨어 있다 나온다. 큰아들 말에 의하면 낮에도 이불장 문을 열고 거기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입양 2년이 다 되어가는 까미조차 이러니 나리는 지금 얼마나 적응이 힘들까? 갑자기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리는 낮동안은 캣타워 꼭대기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경계를 어찌나 심하게 하는지? 정말 웃긴 건 나와 남편이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뛰어내려와 여기저기 탐색을 하는 거였다. 더 웃긴 건 다음 날 아침 나리의 행동이었다. 남편 나가는 문소리가 나자마자 턱 소리를 내며 내려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물론 경계는 여전했다. 고양이가 아무리 인내심이 많더라도 캣타워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되었다. 내려오자마자 화장실을 가고 먹이도 먹고 물도 마시고. 그리고 나와 낚싯대로 놀기도 했다. 침대 위에서. 조금은 집에 적응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돌아온 뒤 마음 놓고 잠을 자는 나리

이틀 동안 특별히 한 일도 없는데 너무 피곤했다. 까미에게 안약을 넣어주고 간식을 준 다음 바로 잠이 들었다. 공원에 나가볼까 했으나 오는 봄을 시샘하는 추위에 바람까지 거칠어 포기했다. 올 2월은 가뭄과 한파가 다른 해보다 더 길다는 느낌이다. 특히 바람이 장난 아니다. 새싹을 조금씩 내미는 나뭇가지를 흔들어 일부러 움츠리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 사흘 만에 공원을 나갔다. 박물관 뒤에 가서 아롱이를 찾았다. 경비초소가 있는 조릿대 주변을 돌며 불렀는데 나오지 않았다. 겨우 내 머물던 하수구 주변에도 없었다. 은토끼님이 박물관 정산소 주변으로 아롱이 새끼 고등어가 자주 왔다기에 거기도 둘러봤다. 없었다. 하늘정원을 올려다보니 거기에서 고등어의 진한 회색 무늬가 어른거렸다. 어인 일로 고등어가 마중을 다 나온다. 다소 내성적인 점박이는 나무 사이에서 삐죽 고개를 내밀다 눈이 마주치자 슬금슬금 다가온다. 아롱이까지 나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올라갔다.

"애기들, 밥 먹자~"

서둘러 먹이를 꺼내 놓는데 오늘도 역시 고등어는 앞발로 그릇을 탁탁 쳐댄다. 그 날카로운 발톱에 피를 보지 않으려면 샥~샥 피해 가며 밥을 줘야 한다. 요령이 중요하다. 평소 둔한 내 운동 신경이라도 극대화해 잘 활용해야 한다. 밥을 충분히 먹인 다음 짐을 챙겼다. 귀요미와 다롱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굳이 하루 두 번 밥을 주러 다니는 이유를 따지고 보면 아롱이와 귀요미 때문이다.

그런데, 아롱이가 어인 일로 나를 따라나선다. 새끼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이제 확실히 독립한 모양이다.

"왜? 아롱이 밥 다 먹었잖아?"

좋아하는 북어 트릿에 닭고기 맛 스낵에 캔까지 먹였는데???

물어보는 나를 쳐다보며 바닥을 뒹굴길래 귀요미 자리로 이동했다. 지난 늦가을부터 귀요미는 내가 아롱이를 처음 만난 조릿대 하수구로 되돌아왔다. 문제는 다롱이. 완전 천하 안하무인인 녀석에게 있다. 같은 밥을 줘도 귀요미 밥에 무조건 입을 대고 먹으려 한다. 밥을 먹고 있다가도 어느새 쫓아와 귀요미 밥을 가로채려 한다. 제법 덩치가 큰 까만 냥이가 밥을 먹으러 나타나도 그 지역의 주인은 자기라는 듯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다롱이 나쁜 버릇을 고칠 수 있는 건 밥 주는 집사 두 사람이나 덩치 큰 냥이들이 아니었다. 나는 아롱이가 나를 따라온지도 몰랐다. 귀요미 밥을 챙기기 위해 다롱이를 견제해야 하는 일이 워낙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정신이 온통 다롱이에게 팔려있었다. 귀요미가 구멍 입구에 나와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성화된 새끼 고등어까지 나타나 자기 여기 있다면서 소리를 낸다. 지역 깡패같이 구는 다롱이에게 쫓겨도 나나 은토끼님을 보면 어디선가 기다렸다 어김없이 다가온다.

다롱이를 피해 상수리나무 뒤에 숨어 우는 중성화된 고등어. 아직 덜 자라 체격이 작은 애기다.

일단 다롱이를 달래기 위해 밥을 먼저 줬다. 먹는 데 정신이 팔리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다롱이는 나나 은토끼님이 주변에 있으면 사람이나 제법 덩치가 큰 개가 다가와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녀석이다. 속으로 '이 녀석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롱이 등이 움찔하더니 먹던 밥그릇에서 슬그머니 입을 뗀다. 녀석 눈치를 살피고 있었기에 그 순간이 정확히 포착되었다. 아직 귀요미 밥은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았는데 뭐지? 싶어 돌아보니 어느새 아롱이가 다가와 있었다. 여왕님의 귀환이라고나 할까?

나는 정말 유쾌한 웃음이 났다. 나도 모르게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최근 다롱이는 하수구에서 귀요미가 머리만 내밀어도 쫓아와 난리를 부렸다. 그걸 견제할 이 구역 최종 보스가 나타난 것이다. 다롱이가 슬그머니 먹던 밥그릇에서 물러나자 아롱이가 그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제법 배가 부를 텐데도.

밥을 먹다 물러난 다롱이가 화풀이를 위해 머리를 내밀고 있는 귀요미에게 덤벼들려 할 때였다. 어느 틈에 아롱이가 다롱이에게 쫓아가 아르릉거리며 엉덩이를 물려는 액션을 보였다. 깜짝 놀란 다롱이가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 사이 나는 가방에 넣어둔 귀요미 밥을 부지런히 챙겨 하수구 안에 넣어줬다. 닭가슴살에 츄르까지 얹어 줄 시간을 번 것이다.

내 추측이지만 아롱이와 귀요미는 남매지간이다. 내가 처음 아롱이를 만난 해에 둘이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는 사진도 있다.

귀요미는 은토끼님의 공원 냥이 사랑의 출발점인 녀석이기도 하다. 귀요미를 챙기시다 아롱이를 만나신 것이다. 결국 각종 사건사고에 얽히고설킨 인연의 실타래 맨 시작점이라고 할까? 자리를 수시로 이동하는 귀요미를 내가 찾지 못해도 은토끼님은 기가 막히게 찾아내신다. 오죽하면 귀요미에게 GPS를 달아두신 게 아닌가 내가 의문을 제기할 정도다.

다롱이에게 준 밥을 먹고 있는 아롱이.

작년 여름 두 번째 출산과 육아로 구역 관리를 안 해서 그렇지 역시 아롱이구나 싶다. 앞으로 다롱이가 싫어하던 말던 당분간은 아롱이를 데리고 귀요미 자리로 이동해야겠다. 다롱이의 지나친 욕심을 어느 정도 견제해 줄 이 구역 조절자로 말이다. 지난 겨우내 다롱이와의 신경전으로 속 썩은 생각을 하니 갑자기 이 구역 최종 보스 아롱이의 존재감이 엄청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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