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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담근 날 생긴 일

by 권영순

집에 정신이 없었다. 이틀 동안 고추장 담그기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는 일이니 두서가 없는 건 당연했다. 요즘은 밀키트 방식도 많다. 몇 년 전 그걸로 고추장 담그기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남편의 식성에 맞지 않았다. 들어가는 재료 중에 조청이 문제였다. 그걸 빼야 했다. 단 맛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그 맛을 즐기지 않았다. 작년에 담갔던 레시피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아 할 수 없이 유튜브 고추장 담그기를 찾아 열공했다. 그리고 남편 입맛에 맞을만한 걸 조합했다. 결국 내 맘대로 고추장 담그기를 한 것이다. 찹쌀고추장 기본 베이스에 보리밥도 넣어 적당히 담그다 보니 맛에 자신은 없어도 그냥 알아서 잘 먹겠지 싶어 항아리에 넣어 보관까지 마쳤다.

고추장 담그기를 마치고 햇살이 잘 드는 베란다에 내놓은 내 고추장 단지. 옆 통에 작년 담근 고추장이 들어 있다.

고추장 담그기 미션을 이틀 만에 마치고 나니 여러 가지 생각(재료를 까먹어 마트를 2번이나 갔다)이 스쳐갔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읊어야 할 기분이었다. 국화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자연이 들인 노력 이상이 들었다고 자평하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한 번 하는 일이어도 고추장 담그기는 내 전공이 아니다. 당연히 해마다 완전히 새로 하는 일처럼 손이 굼뜨고 머리는 더 굼벵이처럼 굴러간다.

내가 학교에 근무할 때 했던 힘든 일 하나는 학년말 생활기록부 작성이었다. 해마다 업데이트된 덕에 다음 해가 되면 시스템을 다시 배워야 했다. 작년에 해 봤으니 올해는 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항상 버벅거렸다. 그리고 일 지옥에서 벗어나자마자 머리가 알아서 자동 리셋을 시켰다.

작년에는 여름 장독 보관이 힘들었다. 싱거워서인지 고추장에 곰팡이 비슷한 게 생겨서다. 그때마다 소금을 올려 그래도 지금까지 잘 먹고 있다. 해마다 고추장을 담가야 할 정도로 우리 집 고추장 소비가 많은 이유는 모두 남편 덕이다. 고추장 된장을 심하게 좋아하니 2년은 버티려던 계획을 수정하며 살 수밖에 없다.

돌아가신 엄마가 담가주셨던 고추장 된장의 맛을 살리지는 못해도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 집에서 수제 고추장을 담가 먹는 내가 그래도 대견하다. 해마다 내가 하는 일이 못 미더운 게 문제일 뿐이다. 일을 못하는 사람의 특징은 정신없이 늘어놓는다는데 있다. 두서가 없으니 당연하다. 그래도 무사히 작은 고추장 항아리 하나를 채우고 정리까지 마쳤다.

쉬려고 누우면서 종일 들여다보지 못했던 카톡창을 열었다. 은토끼님이 카톡으로 사진과 메시지 보내주신 것을 그때서야 본 것이다. 까미를 끌어안고 막 누워서였다. 까미는 집 고양이답게 낮이면 낮잠을 주무시는 게 일이다. 그러나 이틀간 까미는 꿀잠 기회를 못 잡아 헤매고 다녔다. 부엌과 거실에 뭔가를 늘어놓고 남편과 내가 부산을 떨었으니 마음 놓고 잠을 잘만큼 안정을 찾지 못했을 터였다.

너무 놀라 누워있던 천근 다리를 일으켜 세웠다. 아롱이가 곧 죽을 것 같아 보인다고 하셔서다. 이번 주 화수목까지는 은토끼님이 오전 근무 시라 애들 밥을 챙기신다. 그런 날을 일부러 골라 비교적 무게가 큰 집안일을 해치운다. 꾀를 부리면서 요리조리 미루던 장 담그기를 그래서 하게 된 것이다.

날이 조금씩 풀리기는 했다. 하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 한기가 여전했다.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공원을 나갔다. 은토끼님이 보내주신 사진 장소를 찾아 아롱이를 불러봤다. 안 나왔다. 박물관 뒤를 돌아다니며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설마 하면서도 가슴이 서걱거리는 기분이었다.

"아롱아. 춥고 긴 겨울 다 가고 봄이 오는데 죽긴 왜 죽어? 이제 살만한 계절이 오는데."

나도 모르게 주절거려댔다. 날이 많이 추워졌던 며칠 전 밤이다. 아무래도 핫팩을 집에 넣어줘야 할 것 같아 밤에 나왔다. 날이 많이 추우면 냥이들이 집에 들어가 잠을 잔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핫팩을 넣어주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어디선가 아롱이가 나와 따라다녔다. 내가 불러대지 않아도 야옹~하고 나오는 녀석이 아롱이다. 발소리로 알아보는 녀석이 아롱인데??? 왜 안 보이지? 목소리에 갈수록 힘이 없어졌다.

박물관 담 아래 개 세 마리를 훈련시키는 여자분들이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 출입이 거의 없는 한적한 곳이다. 견원지간이라는 말이 있지만 난 그 말을 바꿔 견냥지간이라고 생각한다. 공원 냥이들은 개를 보기만 해도 놀라 피한다. 하필 아롱이가 죽을 것 같이 힘이 없어 보이고 잘 먹지도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자리에 개가 세 마리나??? 여긴 아롱이 영역인데???

은토끼님을 만났더니 아롱이가 힘이 없고 행색이 말이 아니라고 걱정을 하셨다. 새끼들이 자주 나오는 곳에도 샅샅이 부르며 다녔다. 하늘 정원 꼭대기도 갔다. 더 이상 다리가 아파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아롱이를 보셨다는 장소에 한 번 더 갔다. 박물관 뒤를 찬찬히 훑었다.

근래 코에 점이 있는 녀석이 아롱이 주변에 자주 나타났다. 볼 때마다 밥을 챙겨줬다. 속으로 그 녀석이 아롱이 새끼들 아빠가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1월 말부터 녀석이 자주 먹은 걸 토하고 입 주변으로 침을 심하게 흘린다는 데 있었다. 약을 지어다 먹여야 하나 걱정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걱정을 했다. 행여 아픈 녀석이 아롱이와 새끼들 주변에 있으면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을까 봐서다. 보름 넘게 녀석이 보이지 않아 혹시 잘못된 게 아닐까 싶었는데... 이번에는 아롱이가???

두 번째 새끼들을 독립시키고 다시 혼자가 된 아롱이. 죽을 것 같이 보인다는 소리에 놀라 나가서 찾은 다음 밥을 먹였다. 먼지투성이다.

은토끼님에게 내일 나와 보겠다는 인사를 하고 난 다음이었다. 다시 그 자리로 갔다. 내가 돌아다니며 아롱이를 찾는 사이 개 세 마리와 여자들 대신 박물관 돌담 근처 풀밭에 어떤 여자분이 누워 햇볕을 쪼이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변압기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다 익숙하고 작은 몸체 삼색이가 눈에 들어왔다. 넘어가는 햇살 아래 추위를 피하고 있는 아롱이였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반색을 하며 부르니 스트레칭을 하며 다가온다. 밥그릇을 꺼내 좋아하는 트릿과 스낵을 부어줬다. 먹었다. 제법 당차게. 가방을 뒤져 평소 주는 것들도 주니 많이는 아니라도 먹기는 한다. 어느 정도 먹는 거 같아 물을 먹이러 데리고 이동했다. 그것도 제법 먹는다.

'아롱아. 내일 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이 근처 있어야 해? 내가 부르면 꼭 나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다리 주변을 돌며 비비더니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바위를 올라간다. 4년 밥을 먹여도 다리 비벼주기는 거의 하지 읺는 행동이다. 가슴이 뜨끔하다. 어디 먼지 구덩이에서 뒹굴었는지 털이 엉망이다. 눈에 눈곱이 낀 데다 힘이 없어 보이는 것도 걱정된다.

까미의 녹내장은 아롱이 유전이 맞는 모양이다. 저 녀석 혹시 신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물을 항상 챙겨 먹였으니 아닐 거라고 믿기로 했다. 내일 나오겠지? 그러나 다음 날 아롱이를 만나지 못했다. 박물관 주변을 돌며 불러도 안 나온다. 포기하고 일단 귀가.

다음 날 오전에 나가 부르니 뒤뚱거리며 나온다. 배가 장난 아니다. 혹시 또 새끼를??? 아니겠지???

아파보이는 아롱이.jpg 얼굴과 몸이 많이 지쳐 보인다. 무엇보다 몹시 지쳐 보인다. 물과 습 사료를 먹더니 어디론가 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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