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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ca Mar 23. 2022

내가 아들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

마흔이 넘어 내면아이를 마주하게 된 이야기

  

  아들은 하고자 하는 욕심도 많고 사회성도 좋고 밖에서 놀 땐 아주 활발하지만, 원래는 기질적으로 섬세하고 예민한 편이다. 목소리가 크고 강압적인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든다. 화나는 감정, 슬픈 감정을 참고 속으로 삭인다. 엉엉 소리 내어 울지 않고 숨죽이며 운다. 원래 말이 좀 느린 편인 아이는 남편과 내가 말다툼한 것을 목격한 후 내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때 문장 속 한 단어를 두, 세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며 이야기를 잘 끝맺지를 못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평소 목소리가 작은 편이고 부탁하는 말을 할 때면 혀 짧은 소리를 낸다.   

   

  분명 아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내 앞에서 말을 제대로 끝맺지를 못하고 빙빙 둘러말하고 혹시나 말을 잘 못해서 혼날까 봐 눈치 보는지,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 탓인지 말이 한도 끝도 없이 느려지는 아이를 보면 속이 터졌다. 도대체가 남자아이로서의 전통적인 미덕인 기개, 용맹함, 추진력,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고 자신감이 없고, 소심함의 끝인 것만 같은 그 말투가 너무 거슬렸다. 아이와 의미 있는 대화를 하고 싶어도 아이가 입만 열면 꼴도 보기 싫어지는 이 감정 때문에 도마뱀이 제 꼬리를 문 것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괴로워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 아이인데 나는 엄마인데 도대체 왜 이럴까? 한편으로 내가 아이에게 폭군 같은 강압적인 엄마이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더 고통스러웠다.      


  목소리를 듣기 싫은 것을 떠나 아들이 싫어지려고 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고, 점점 늪으로 빠져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평소 무기력하고 이기적이고, 남 탓하기 좋아하는 남편에 대한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아들이 마흔이 넘어도 여전히 헬리콥터처럼 관리하며 집안 대소사와 각종 큰일에 모든 해답을 제시하는 친구의 시어머니의 영향이 아니겠냐는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이 났다. 10년도 더 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아버지는 용띠의 불칼같은 성미를 갖고 계셨다. 가부장 끝판왕, 전형적인 꼰대, 소통이라고는 모르고 주위 모든 사람들을 눈치 보게 만들었다. 화가 나면 이성을 잃을 때가 많았다. 아무도 그 논리에 반박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형제자매들도 모두 눈치를 보고 한마디로 제왕 같았다. 나는 평생 불통 같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싫었지만 나도 모르게 내 안에는 남자 상의 기준이 아버지가 되어있었나 보다. 그 기준에는 강한 책임감, 카리스마, 누구도 꼼짝 못 하게 하는 언변도 포함이 된다. 마음속 남성상을 기준으로 아들을 평가하고 재단하고 있었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그동안 이유를 몰라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돌아가신 후로도 내 안에서 나와 같이 살아온 아버지.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자기한테도 그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해왔던 것은 아니냐고 했지만 남편은 다르다. 남이어서 타협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지 남편의 모습을 보며 고통스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이니까 오히려 내가 내 마음대로 굴면 나에게 실망하고 떠나가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이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아들에게는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해서, 나보다 힘이 약하다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만만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아이는 엄마인 내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이니까. 한 마디로 내가 옳고 내 기준이 정답이고, 아이는 아무것도 존중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친정아버지와는 많이 다른 아이에게 왜 넌 내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거냐며 불만을 품은 채로 아이를 바라봤던 게 아닐까. 나는 무엇이 두렵고, 불안했던 걸까. 왜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나.      


  무조건 공무원이 되어 빨리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강한 바람과는 달리 미술학도의 꿈을 키우다 실패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프리랜서 비정규직으로 20대를 보냈던 나.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자랑스럽지 못한 모습만 보여드리다 결국 아버지를 암으로 이른 나이에 보내드려야만 했다. 공무원도 되지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한, 아버지 눈에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내 모습만을 알고 가셨기에 나는 아직까지도 뭔가를 증명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허기짐이 남아있다. 한 번도 순수하게 아버지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받고 신뢰를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엄마가 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매년 휴가철이면 식구 모두 계곡으로 캠핑을 가곤 했는데, 내가 중학생이 되자 더 이상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단다. 아버지는 휴가지에서 그렇게 딸내미랑 같이 왔으면 좋았을걸 했다고 한다. 그러다 휴가 말미에 내가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을 엄마에게 언뜻 비치자 그 먼 곳에서 차를 몰아 나를 단숨에 데리러 올 정도로 딸을 그렇게 생각했다고 했다. 옆에 있는 엄마는 그렇게 차갑게 대했으면서 미처 진심이 닿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딸을 챙기고 생각했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차를 정리하다 접이식 미러에 꽂혀있던 오래된 손편지를 발견했다. 그 편지엔 아빠가 자랑스러워하는 딸이 되고 싶어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라고 쓰여있었다. 가슴이 텅 비고, 쓰라려 차 안에서 혼자 오래 울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 없이 몇 년 후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상처받고 혼란스러웠던 그때 그 아이가 10살 난 아들을 마주한다.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많이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나는 아들을 위해 새로워져야 한다. 미대를 가지 못했다고, 공무원이 되지 못했다고 괴로워만 말고 이렇게 무엇이 되지 못했어도 나도 내 삶을 사랑할 권리가 있다고 스스로에게 외치고 싶다. 고통스러워도 똑바로 마주 보고 글로 털어내고 아이를 새롭게 마주하고 싶다. 아들이 엄마를 싫어하도록 만들기 싫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아이로 만들기는 더더욱 싫다. 내 안에 아버지를 깨달은 날 밤 아들의 손을 잡고 나란히 누워 얘기를 했다. 


“아들, 엄마가 무서워?” 

“응, 엄마가 화내는 게 제일 무서워. 화는 좀 안 냈으면 좋겠어.” 

“너도 알다시피 엄마, 아빠는 서로 화내고 싸워도 그날 화해하고 또 잘 지내. 서로 다른 사람이라 생각이 달라서 싸울 수도 있어. 싸우고 나면 서로 조심해야 하는 것을 알게 돼서 예전보다 더 잘 지낼 수 있어. 그리고 엄마 아빠는 화를 내더라도 서로 사랑해. 그걸 잊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화는 안 냈으면 좋겠어. 엄마는 화내는 모습이 제일 무섭고 싫어. 난 엄마, 아빠가 좋기 때문에 화가 나도 화를 안 내는 거야. 그리고 화 안 내겠다고 약속도 해줬으면 좋겠어.” 

“그래, 그 정도로 화내는 게 무섭고, 싫었어? 엄마가 노력할게.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해. 사랑해.”

“응, 알았어. 나도 사랑해, 엄마.” 


  아들이 안아줬다. 내가 마음 아프게 해도 엄마를 사랑한다며 안아주는 아들. 아이에게서 큰 사랑을 배운다. 아이를 보며 다짐한다. 나는 아무도 아니어도 나를 사랑하며, 햇살처럼 밝고, 한없이 넓은 마음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아가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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